질문과 대답 사이 (“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저는 무엇입니까? )
성프란치스코에 대한 글에서 그는 어느 날, 밤을 새워가며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저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앎이요 인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영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겸손한 질문으로 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영혼의 심연과 하느님 현존의 심연이 열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창조와 더불어 피조물들을 통해서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찾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하느님의 신비에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이 자신의 변화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문을 여시고 당신 품으로 초대하시기에 응답은 이미 주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하십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응답에 나의 질문이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과 나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만나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볼 때, 그리고 심연이 열리는 순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있었다는 인식을 영의 활동으로 알아들을 때 비로소 내 마음이 찾는 원천의 갈망이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무한 신비에 연결되었음을 알고 나의 질문에 그분이 응답하고 계신다고 느끼는 바로 그때 내가 받아들여졌다고 깨닫게 됩니다. 창조의 사랑은 창조하시는 분의 자유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받아들여졌음을 아는 건 창조하신 분께서 나를 지어내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도구 삼아 그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질문은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라기보다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기에 하는 질문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 ” (시편 8)
우리의 갈망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성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넘쳐흐르는 자비의 샘에서 목을 적시고 부르는 노래, 감사에 넘친 찬미와 찬송과 찬양의 노래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 안에서 변화의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 내면의 죽음이 사랑에서 나왔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가쁨이 있는 곳에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저는 무엇입니까?
질문과 대답 사이 하느님 나라가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