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앞에서 약해져야 우리 자신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생활은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비의 길)
세례성사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믿는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려오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육화를 새로이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육화시키신 성령은 우리의 생활 안에서도 말씀의 육화를 계속하십니다. 우리는 도구적 존재로서 육화를 삶으로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결합 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의미를 잃고 맙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계적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 한가운데서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우리 실체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의 초대에 응할 은총을 주실 뿐입니다. 영적인 갈망은 행복과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갈망하면서 시작됩니다.
가난은 우리 안에 사랑과 성령이 머무실 자리를 내어 드리기 때문에, 나약한 인간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고 그 신비를 바라보게 허락합니다. 가난이 기도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기도는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기를 요구합니다. 마음은 인간의 중심입니다. 마음의 중심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성령은 마음의 상처들을 치료해 주고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하느님께 중심을 둔 마음은 사물을 깊이 볼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심화시켜서 일상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식물, 모든 피조물, 모든 사물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부터 창조되었고, 각자의 존재 자체로써 그 선하심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육화되었으므로, 모든 것은 어떤 면으로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것은 거룩하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 이끄는 기도는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선하심이 창조의 중심에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연민의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되고, 새롭고 더 깊은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의 힘과 약함, 재능과 단점 등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만큼 사랑합니다. 보다 더 완전하고 순수하게 볼수록, 더 완전하고 더 순수하게 사랑합니다”. 결국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생활의 목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었으며, 자신을 기꺼이 바쳐서 사람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을 갈망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참사랑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는 말로써가 아니라 생활의 모범으로 선포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남을 위하여 기쁘게 고통받고 생명까지도 바치는 삶의 모범으로써 선포되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관계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 앞에서 약해져야 우리 자신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우쳐 주며, 우리가 표양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고 선포하도록 인도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너를 위하는 것보다 더 너를 위하시고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맘대로 통제하고 조종하고 하려는 사람한테서는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처럼 신앙의 여정을 걸으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적 한계 안에서 위축되고 의심하고 하느님 사랑에 대하여 질문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유혹당하실 때, 제자들을 뽑기 전에, 당신을 반대하는 자들과 맞서는 동안,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신앙을 지키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선의 흐름과 사랑을 신뢰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선의 흐름이 시작되었기에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나를 통해서 이 흐름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허용할 때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기쁨과 자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