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째 날: 당신의 삶에 자리잡기, 이정표들을 보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삶에 내려놓는 이정표들을 알아차리기 위해 당신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과거와 현재의 이 이정표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이정표들을 알아차리는 다른 방법들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하나의 지장을 은총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복도에서 기대하지 않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하나의 공감의 기회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첨언) 현대인이 삶의 속도, 삶의 템포를 낮추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템포를 낮추면, 무한 경쟁에서 뒤처질 것 같아, 최소한 남들의 속도에 맞추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남과의 속도를 맞추거나 속도를 더 냄으로, 우리는 안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치고 삶의 방향감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템포를 낮춘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내 중심으로 보는 시각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원래 내 자리인 경계선에서(천사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열린 마음으로 삶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중심적인 삶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가 보이고,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이 보이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보입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나를 주위 관계에서 떼어놓고 이 정체성을 찾고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영향 속에 있고, 그 관계 속에서 나의 의미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하느님상이 깨트려질 때와 나의 이미지들이 깨어질 때, 아이러니 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틀을 내려놓고 다름이신 하느님께로 나를 던질 때에, 이 만남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두려움이 함께 합니다. 우리가 이 두려움 가운데에 이 움직임을 한다면, 이 움직임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두려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날 것이고, 우리는 이 움직임을 계속 할 원동력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반대의 움직임을 한다면, 우리는 거짓 안정감에 사로잡혀 ‘나’ 혹은 ‘내 식’의 쳇바퀴만 돌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4에서 가난한 영을 가진 이는, 기도를 많이 하는 이도 아니고 하느님의 일에 열심한 이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의 템포로 이러한 기도와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는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합니다.” 가난한 영을 가진 이는, 자기가 기대하는 대로 행하지 않는 이나 환경들을 만날 때, 사랑의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사랑 가운데에서 그는 나에 집착하는 마음에 여유를 불어넣으며, 너이신 하느님과 너이신 이웃에게로 나아갑니다. 그 가운데에 융합되어가는 하나됨이 아니라, 고유함이 살아나는 하나됨이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