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둘째 날: 움켜잡은 것을 내려놓기
당신의 삶에서 움켜잡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그래서 당신에게 다가온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에서 (소유당하지 않고) 참 기쁨을 만났던 사례들 몇 가지를 제시해 보시오.
첨언) 유한성을 지닌 인간은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인간은 무언가로 채울 수밖에 없는 마음을 지녔기에 중독의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허한 마음을 물질이나 행위나 관계로 채우면서 우리는 마음의 허함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오히려 마음은 그 사람이나 그 물질이나 그 행위에 매어, 더 깊은 허함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허함을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공간이 되게 할 때, 우리는 중독에서 발생하는 것과는 반대의 자유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공간과 여백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의 이미지나 내 생각의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을 무미건조함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느님적이지 않는 무엇에 우리 마음을 우선적으로 내어줄 때, 우리 마음 공간에 하느님의 여백은 그만큼 축소되기에, 그 무엇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께 우선성을 내어드릴 때, 우리의 갈망들도 하느님을 향하는 갈망으로 질서지어지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 자유를 만나게 됩니다.
클라라는 가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임을 프란치스코를 통해 프란치스코와 함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고 또한 형제회가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 아니라 사목에 에너지를 쏟고 있을 때, 클라라는 이 가난을 수호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는 클라라의 자매들이나 다른 가난한 자매회들이 안정된 생활틀에서 하느님께 몰두해서 기도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려 하였습니다. 클라라는 교황의 생각은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지만, 그 생각을 자기와 다미아노의 자매들에게 허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클라라와 자매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클라라는 교황의 생각에 반해서 ‘가난 특전’이라는 땅을 소유하지 않을 수 있는 이상한 특전을 교황으로부터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 클라라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수도규칙을 작성하여 인준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입증된 수도규칙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된 이후였습니다.
클라라는 고집스럽게 자기의 주장을 내려놓지 않고 추구하였습니다. 아마 외부에서 이런 클라라를 보면서, “클라라는 가난 중독에 빠져, 교황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클라라는 가난 중독에 빠졌을까요? 중독에서 빠졌는지를 알아차리는 요소들로는 내성, 금단현상, 사고의 왜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에서 빠졌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클라라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클라라는 오히려 교황의 생각이나 사람들의 말에도 좌우됨 없었고 또한 이 가난 가운데 자매들을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품었던 성모님을 보면서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러한 삶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실 수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고 바치곤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인사드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