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만이 자기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인간의 죄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에 직면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중독자들입니다. 이러한 중독을 성경 전통에서는 죄라고 부르고,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정욕 또는 집착이라고 불렀으며 현대에서는 중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질적 중독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중독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중독되어 있는 건 습관적 행동, 우리의 사고방식,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중독증상을 알지 못하는 건 항상 그럴듯한 무엇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 하셨듯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더러운 영에게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어야 합니다. 포장을 벗겨야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나를 아는 앎이 우리 삶을 바꿔놓게 하고 변화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려면 찾아 나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만을 믿고 살아왔기에 스스로 찾지 않는다면 여전히 중독된 상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찾아 나선다는 말은 우리 안에 심어놓은 하느님께 대한 원초적 갈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실제로 진실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하면 깊이 바라보고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생각과 정신이 있습니다. 생각을 살피면 그것이 말이 되고, 말을 살피면 행동이 되고, 행동을 살피면 버릇이 보이고 버릇을 살피면 성격이 드러납니다. 성격을 살피면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피는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아는 지고한 지식” 때문에 지금까지 철저하게 바리사이의 삶을 살아왔던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겨 쓰레기로 버렸습니다. 알기 위해서는 알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알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 보이기 위해 만든 포장된 위선과 거짓말, 합리화와 변명들이 위장된 악입니다.
인과응보의 틀이 만든 선은 대부분 위장된 선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까지도 그러한 틀에 넣어 생각하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악이 종교전쟁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로, 흑(黑)이 아니면 백(白)으로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생각으로 참된 개혁을 하고자 한다면 그 개혁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참된 개혁은 이전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새것으로 채우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전 시대, 이전의 교회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중세교회의 혼돈 속에서도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교회에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경험과 지혜로 후반부 인생을 설계할 때 반드시 이전의 전통과 법과 경계를 모조리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개혁과 혁명은 역효과를 내어 다시 이전의 전반부 인생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한 채 가짜 개혁과 실패한 혁명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분법적이고 인과응보의 사고방식과 틀에 묶여 마침내 자기가 속한 집단에도 등을 돌리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실망스러워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 몫을 살도록 허용하면서 나는 내 몫을 찾아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악조건에서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논쟁을 벌였어도 싸우거나 헤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프란치스코 역시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미워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화를 내거나 흥분과 분노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운 사람은 허용과 용서를 분별할 줄 압니다. 어느 경계나 울타리가 유지해야 할 가치가 있고 어느 것이 양보할 수 있는가를 압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잠을 설치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갈등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굴복하는 길이며 순종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참된 나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안전한 공간이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때만 너는 더 이상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닙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이상적인 집단을 만들기 위해 배척과 추방과 징벌을 한다면 노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할 뿐이며 사랑과 일치라는 임무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은 믿음으로 드러나는 태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말씀에 굴복하고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을 받아 들고 나를 내어주면서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사는 자기중독에서 해방된 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