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위선을 질책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도덕적 성취가 곧 구원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서의 계시가 도덕적 성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눈뜸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며 또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허용하시는 하느님보다는 지배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느님을 더 좋아합니다. 인과응보의 논리로 하느님을 설명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허용을 배우기 전까지는 말씀이 나를 바꾸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허용을 이용하는 결과만 남게 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일차적인 이유가 어떤 역할과 과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자신이 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되도록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말해주는 신비는 만물은 각자 그 자체로서 존재함으로써 선택받고, 사랑받고, 보존되는 신비로써 하느님의 돌보심을 드러냅니다.
일단 우리의 영혼이 겉껍질을 벗고 진짜 자기에 이르면 우리의 영혼은 놀랍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자연스럽게 초연하며 어느 것에도 중독되지 않습니다. 또 무엇을 붙잡고 늘어지거나 고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구체적 일을 하는 데서, 보다 순수한 존재가 되는 데서 이미 인생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어드린 자유 안에서 영이 활동할 공간이 마련 되면 우리는 누구와도 함께 더불어 살며 다른 피조물과도 어울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것을 배제한다거나 우월의식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영의 거처로 내어드린 내 자유 안에서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과 우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체와 연결된 자신을 보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 안에서 이미 중요한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이처럼 은혜롭게 나를 이 세상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살도록 하셨다면 도대체 왜 그분께서 다음 세상이라고 마음을 바꾸시겠습니까? 사랑은 영원하며 죽음의 공포는 사라집니다.
가짜 자기는 나쁘기보다 본인이 모르는 자기입니다. 본인이 모르는 이유는 가짜 자기가 그 이상인 것처럼 젠체하며 자만심과 우월감으로 꾸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다양한 가짜 자기들, 일시적인 옷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 한계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계속 진짜로 성장하게 되면 가짜 자기는 더 큰 빛에 노출되어 죽고 맙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의 가짜 자기를 내려놓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고착되어 있으며 덫에 걸려있다는 뜻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가 죄였습니다.
우리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의 가짜 자기를 넘어설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면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삶의 방식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배우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으며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해방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전체에 연결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애착을 느꼈던 부분을 보호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