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그리스도의 평화
두번째 잘 잘라야 한다는 것은
미련없이 과감하게 포기하는 단순함과
결단력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의 잘 보게 된 것을 선택하였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고,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미련이 남을 수가 있다.
막상 포기하려고 하니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과감하게 단번에
잘라버리는 단순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당시
영과 육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셨어야 했고,
예수님 또한 인간이셨기에 영적이셨지만
동시에 육적인 이끌림도 없지 않아 있으셨던 것이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의 칼로 (에페소 6장?)
단번에 미련없이 자르셨다.
바로 예수님은 잘 잘랐던 분이셨다.
프란치스코의 경우에도 알수가 있듯이
그도 역시 과감하게 잘 잘랐던 사람이었다.
형제들을 하나같이 주인으로 섬겼지만
옳고 그름에 있어서는 칼 같은 사람이었고, 과감했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참 잘 잘랐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잘 자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올바른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때때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를 못한다.
머뭇거리고, 나중의 일로 미루고, 게으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욕망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잘 잘라야 한다.
잘 자르지 않으면 안된다.
잘 자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영혼을 바로 세우는
지지대 작업의 두번째 작업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잘 박아야 한다는 것은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 잘 보고, 잘 잘랐지만
그 잘 자른것을 가지고 항구하게 끝가지 가야 한다.
아무리 잘 잘랐어도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그 자른것을
항구하게 안고 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작심삼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작심삼일이 된다면 아무리 잘 보고,
자르고 해도 소용이 없다.
마지막으로 잘 박아서 꼭껴서 박아 넣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습관이 되게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당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잘 보고 잘 잘랐지만
그 후에도 하느님의 말씀안에서
늘 한결같이 항구하게
그 말씀안에 머물러 계셨던 분이셨다.
프란치스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복음이라고 하는 진주를 발견하여 복음의 기준으로
세속적인것과 천상적인 것을 잘 보고
자신의 욕망을 잘 자르고 했지만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절대 그 복음에서
놓지 않고 끝까지 안고 항구하게 나아갔다.
늘 한결 같았던 것이다.
지지대를 박을 때도 마찬가지다.
벽에다 대고 맞춘다음 한곳만을 계속 쳐야만 한다.
그래야 들어간다.
그런데 이리 쳤다가 저리 쳤다가 하면 안들어간다.
오히려 틀어질 뿐이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그 좋은것을 몇번하다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항구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을 바로 세울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허물어져 가는 벽을 바로 세우는
지지대 작업을 통해서 바라본
내 영혼을 바로 세우는
지지대 작업의 단계이고 순서이다.
이러한 3가지의 단계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수도생활에도 적용을 시켜서 살아간다면
육신의 나약함으로 허물어져가는
우리의 영혼을 받쳐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