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무한하고 완전하신 말씀이시다. 인류의 모든 언어는 영원하고 가장 아름다우신 말씀의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말인 한글도 가장 아름다우신 “말씀”의 빼어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무한한 창조성 안에서 거룩한 말씀이신 하느님은 우리 배달겨레와 긴 세월 동안 한글로 말씀해 오셨고, 지금도 한글로 말씀하고 계신다. 배달겨레는 기도할 때 한글로 말씀을 드리고, 하느님은 한글로 드리는 우리 겨레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한글로 응답을 해주신다. 한글은 이렇게 성령께서 만들어 주신 하느님과 배달겨레가 대화하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탁월한 영적 마당이다.
배달겨레와 하느님이 거룩히 만나고, 성령의 얼이 깃들어 있는 거룩한 겨레의 말, 특별히 그리스도교 언어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형언할 수 없는 애정으로 일생 숨어서 다듬고 가꾸어온 분이 계시다. 허종진 바오로 선생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이분은 25년이 넘도록 우리 겨레와 하느님이 대화하고 만나는 한글이 보다 쉽고 보다 아름답게 다듬어지도록 그른 말은 바로잡고, 혼란스러운 말은 통일하고, 그리스도교의 낱말들은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새기면서 홀로 “한국 가톨릭 사전”을 준비해왔다. 이 사전 작업은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한글 학자로서 한 평신도가 그리스도교 언어들을 다듬었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새롭고 진귀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전의 마무리를 앞두고 허 바오로 선생님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마음, 가눌 수가 없다.
내가 허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시기는 1993년 서울 정동 수도원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이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관으로부터 인터폰이 왔다. 아무나 전화를 받아보라기에 인터폰을 받은 김에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은 처음으로 통화하는 나에게 당신은 <가톨릭 용어 큰 사전>을 만들고 있는 허종진 바오로라는 사람이라고 간략히 소개하신 뒤, 사전 작업 중 프란치스칸 성인들에 관한 의문점들이 있어 전화를 하셨다는 것이었다. 수도원 들어오기 전에는 나도 한때 국문학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사전 자료를 찾는다는 선생님의 요청을 무심히 흘려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부탁하신 자료를 도서관에서 복사해 알려주신 주소로 보내드렸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 날 허 선생님께서 수도원 앞에 있는 성 바오로 서원엘 들르셨다 나를 찾으셨다. 그 때 허 선생님을 처음 뵙고, “한국 가톨릭 사전”에 대한 계획도 듣게 되었다. 사전의 동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허 선생님이 한글학회에서 근무하며 “우리말 큰 사전”을 준비할 때이다. 사전 편찬 위원회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들과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허 선생님 사이에는 가톨릭 낱말을 놓고 미묘한 긴장이 빚어졌다. 그 중 개신교 신자 한 명과 유독 더 대립하게 되었는데, 현재 한국에는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 신자보다 더 많기 때문에 다수가 사용하는 개신교 낱말이 그리스도교 낱말로는 표준어라는 논리로, 그는 가톨릭 낱말들을 가능한 한 사전에서 없애버리려 했고, 사전에 실리는 가톨릭 낱말들도 개신교 냄새가 나는 낱말들로 뜻을 새기면서 둔갑시켜 놓곤 하였다. 그래서 허 선생님은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 가톨릭 개신교 이념을 떠나 가능한 한 원문에 가깝고 쉬운 우리말로 사전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개신교 신자는 막무가내였다. 허 선생님은 그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당한 행위를 막을 길이 없고, 솟아오르는 분노심 또한 억누를 수 없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면죄부”라는 낱말을 수십만 장 되는 카드 목록에서 뽑아버렸다. 그래서 1992년 출판된 “우리말 큰 사전”에는 이 낱말이 빠진 채 간행되었다. 이 비화는 허 선생님이 유언으로 남겨놓은 고백이지만, 그리스도교 낱말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말이 안고 있는 아픔과 더불어 가톨릭 한글학자로서의 허 선생님의 숭고한 사명감을 엿보게 해준다.
“우리말 큰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이런 갈등을 계기로 허 선생님은 본인이 직접 “한국 가톨릭 사전”을 만들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1981년부터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원칙상 이미 출판되어 있는 모든 사전의 새로운 낱말들은 모두 새로 편찬되는 “우리말 큰 사전”에 싣도록 규정되어 있어, “한국 가톨릭 사전”을 마련해 놓으면, 다시 “우리말 큰 사전”이 개정될 때에는 이 사전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 선생님의 “운명”과도 같은 사전 준비는 이렇게 출발하게 되었다. 그 후 낮에는 한글학회에서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한국 가톨릭 사전” 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을까, 허 선생님은 긴 시간 동안 겹쳐진 과로로 그만 건강을 잃게 되었고, 결국 1992년 간경화로 한글학회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일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건강을 돌보며 자택의 “나분다리 글방”에서 오로지 가톨릭 사전 작업에만 몰두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이 끝없는 외로운 일을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끌어안고, 14년 남짓 지났을까? 눈뫼 허 웅 선생님을 비롯하여 존경하는 은인들이 모두 연세가 많으셔서 그분들이 살아 계실 때에 일을 이루어 그분들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듯 일을 하다 또다시 건강을 잃게 되었다. 작년 3월 어느 날 아침 피를 토하고 병원에 가보니, 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동안 오로지 사전 편찬에만 매진하느라 친구들과 친척들마저 멀리하며, 오직 배달겨레의 말을 다듬는 일에만 심혈을 쏟아 왔는데...... 위암 말기라니! 선생님의 슬픈 소식을 듣고 나는 하늘이 무심하다는 심경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좇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청산에 묻혀 사는 선비처럼, 심산에서 수도하는 선승처럼, 그리스도교 낱말을 다듬는 일만을 하늘이 준 소명으로 받들고 이 외길만을 달음질쳐 왔는데...... 하느님께서는 최소한 건강은 지켜주셔야 마땅한 도리 아닌가! 무엇보다 하느님께 대한 원망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허 선생님은, 찾아온 죽음마저 “자매”로 찬미하며 받아들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위암”을 찾아온 형제처럼 받아들이고, 항암 치료도 거룩히 포기하셨다. 항암 치료를 하면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다 마칠 수 없노라며, 생명이 허락되는 한, 배달겨레가 보다 더 쉽고 보다 더 친밀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한국 가톨릭 사전”을 꼭 마무리해야 한다며, 당신의 십자가 속으로 오히려 위암을 포옹하고 들어가셨다. 선생님은 진정코 배달겨레의 그리스도교 말을 위해서 태어나신 사도이시고, 겨레의 말에 담겨 있는 거룩한 “얼”을 다듬느라 온 생애를 송두리째 산 제물로 사르신 순교자이시다. 그 후 선생님은 아무런 변함없이 일산 당신의 소박한 “글방”에서 암도 죽음도 초월하여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생명을 산화시키며 오로지 말씀께서 소명으로 주신 숭고한 우리말을 마지막으로 다듬으셨다. 홍색 순교보다 더 아름답고 거룩한 살아 있는 순교 아닌가!
그러던 8월 어느 날 암 세포가 커져 식도가 막히고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위에 튜브를 심기 위해 병원엘 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병원 사목을 하는 나병국 신부님을 만나 신부님의 간곡한 권유로 뒤늦게 항암 치료를 시작하셨다. 그렇게 1년 이상을 치료를 받으며 선생님은 병원에도 컴퓨터를 안고 가셔서 사전 작업을 계속하셨다. 지금은 체력이 약해져 항암 치료를 지속할 수 없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실 힘마저 부쳐 사전 작업을 멈추신 채 하느님의 특별한 치유의 은사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사단법인인 “한국 그리스도 언어 연구소”를 재단 법인으로 설립하기 위해 일산 나분다리 자택을 팔기 위해 내놓으시고, 지난 9월 18일 김포로 이사를 하셨다. 가진 재산이라곤 아파트뿐인데, 이를 팔아 “연구소” 재단법인으로 설립하면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그러나 선생님의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두 아들은 이미 청년이 되었으니, 스스로 자립하란다. 선생님을 따라 가족들도 십자가를 같이 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금 선생님의 감동어린 말씀이 스친다. 이스라엘 정부가 에티오피아에 기근으로 난민이 생겼을 때 에티오피아의 유다인 1만 명을 이스라엘 국민으로 받아들일 때, 이미 아프리카 흑인처럼 살빛과 체구와 습관이 바뀌어버려 외형적으로는 유다인으로 보기 어렵지만, 2000년 전 로마 제국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 이후 히브리말을 보존하고 탈무드 교육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이들이 유단인이라는 증거로 삼았다 한다. 선생님은 20여 년 전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며 길알림판이 히브리어로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히브리말 전용을 하는 그들이 몹시 부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 정도는 함께 적어 놓으면 좋지 않겠느냐며 그 나라 사람에게 제안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온 세계에 흩어져 2천여 해를 떠돌아 사는 동안 그들에게는 히브리말이 “나라”였고, “정부”였으며, “땅”이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온몸이 떨리는 감동을 받으셨다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히브리말이 사랑하는 영원한 고국이 되어버린 것처럼, 선생님은 이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홀연히 당신의 참된 “집”이요, 우리말로 믿음살이를 하는 모든 믿는 이들의 “고향”이며, 겨레의 안식처인 우리말을 다듬고 가꾸는데 큰 몫을 하게 될 “그리스도교 언어 연구소”를 위해 당신의 아파트를 아낌없이 흔쾌히 쏟아 붇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참된 기쁨이요 거룩한 행복이기에, 이 비련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은 처절하기만 하다.
사전 작업을 시작한 지 어언 25 년이 흐르면서 그동안 허 선생님은 그 일부를 “성서 낱말 사전”과 “한국 가톨릭 용어 큰 사전”으로 출판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 마쳐놓은 분량은 그 열 배가 될 지 선생님 자신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한다. 이 엄청난 일을 홀로 하면서 허 선생님은 한글학회의 우리말 전용 정신에 따라 가능한 한 가톨릭 낱말들을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새기고, 혼란 속에 있는 2,000여 개의 가톨릭 용어들을 바로 잡아놓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고유명사를 통일하는 일과 개신교와 함께 쓰는 그리스도교 낱말들을 일치시키는 일, 그리고 한국 가톨릭의 한글 운동사를 쓰는 일 등 선생님이 가셔야 할 길은 멀기만 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늘 자욱한 안개속의 그 무엇처럼 희미하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지만, 그분의 숨어 있는 뜻을 되새겨보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보잘것없는 수도자로서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나의 인연을 멀리하고, 외롭게 투병하시는 허 선생님이 일생 숨어서 준비해온 노고가 그분 생전에 빛을 보았으면 하는 소박한 개인적 소망을 하느님과 뜻 있는 분들께 사뢰어 본다. 선생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나의 가슴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사상 처음으로 구약을 우리말로 번역하시다 떠나신 선종완 신부님, 암과 투병하시느라 평생 숙원이었던 라틴어 사전을 채 마치지 못하신 허창덕 신부님, 그리고 구약을 새로 번역하셨으나 그 빛을 못 보신 임승필 신부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또다시 허 선생님도 이 신부님들의 슬픈 발자취를 따르셔야만 한단 말인가?
그동안 두 아들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한국 가톨릭 사전”을 자청해서 펴내느라 남모르게 감수해야 했던 힘겨움과 아픔들, 때로는 깊이 파고들었을 외로움들, 고비마다 찾아들었던 좌절들...... 그 수많은 사연들을 나는 헤아릴 수도, 이 비천한 붓으로 그려낼 수도 없다. 그러나 한 평신도로서 하느님과 배달겨레가 대화하고 만나는 거룩한 우리말을 순교자적 소명감을 갖고 그동안 투신해온 허 선생님을 이렇게 보내드리기에는 인간적으로 그분이 너무도 가엾다. “한국 가톨릭 사전”을 위해 인생을 온전히 불사르고, 그리스도교 언어를 위해 세상을 송두리째 내어던진 숨어있는 한글학자, 나분다리 허종진 바오로 선생님, 그는 진정 우리 교회의 자랑스런 보배요, 묻혀 있는 진주이다. 그러나 또다시 하느님께서 그를 이렇게 데려가신다면, 하느님은 정말 “잔인한” 하느님이시다. 암으로 투병하는 허 선생님께 우리가 사전을 편찬하여 그분의 품에 안겨드릴 수는 정녕코 없을까?
배달겨레와 하느님이 거룩히 만나고, 성령의 얼이 깃들어 있는 거룩한 겨레의 말, 특별히 그리스도교 언어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형언할 수 없는 애정으로 일생 숨어서 다듬고 가꾸어온 분이 계시다. 허종진 바오로 선생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이분은 25년이 넘도록 우리 겨레와 하느님이 대화하고 만나는 한글이 보다 쉽고 보다 아름답게 다듬어지도록 그른 말은 바로잡고, 혼란스러운 말은 통일하고, 그리스도교의 낱말들은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새기면서 홀로 “한국 가톨릭 사전”을 준비해왔다. 이 사전 작업은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한글 학자로서 한 평신도가 그리스도교 언어들을 다듬었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새롭고 진귀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전의 마무리를 앞두고 허 바오로 선생님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마음, 가눌 수가 없다.
내가 허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시기는 1993년 서울 정동 수도원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이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관으로부터 인터폰이 왔다. 아무나 전화를 받아보라기에 인터폰을 받은 김에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은 처음으로 통화하는 나에게 당신은 <가톨릭 용어 큰 사전>을 만들고 있는 허종진 바오로라는 사람이라고 간략히 소개하신 뒤, 사전 작업 중 프란치스칸 성인들에 관한 의문점들이 있어 전화를 하셨다는 것이었다. 수도원 들어오기 전에는 나도 한때 국문학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사전 자료를 찾는다는 선생님의 요청을 무심히 흘려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부탁하신 자료를 도서관에서 복사해 알려주신 주소로 보내드렸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 날 허 선생님께서 수도원 앞에 있는 성 바오로 서원엘 들르셨다 나를 찾으셨다. 그 때 허 선생님을 처음 뵙고, “한국 가톨릭 사전”에 대한 계획도 듣게 되었다. 사전의 동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허 선생님이 한글학회에서 근무하며 “우리말 큰 사전”을 준비할 때이다. 사전 편찬 위원회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들과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허 선생님 사이에는 가톨릭 낱말을 놓고 미묘한 긴장이 빚어졌다. 그 중 개신교 신자 한 명과 유독 더 대립하게 되었는데, 현재 한국에는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 신자보다 더 많기 때문에 다수가 사용하는 개신교 낱말이 그리스도교 낱말로는 표준어라는 논리로, 그는 가톨릭 낱말들을 가능한 한 사전에서 없애버리려 했고, 사전에 실리는 가톨릭 낱말들도 개신교 냄새가 나는 낱말들로 뜻을 새기면서 둔갑시켜 놓곤 하였다. 그래서 허 선생님은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 가톨릭 개신교 이념을 떠나 가능한 한 원문에 가깝고 쉬운 우리말로 사전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개신교 신자는 막무가내였다. 허 선생님은 그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당한 행위를 막을 길이 없고, 솟아오르는 분노심 또한 억누를 수 없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면죄부”라는 낱말을 수십만 장 되는 카드 목록에서 뽑아버렸다. 그래서 1992년 출판된 “우리말 큰 사전”에는 이 낱말이 빠진 채 간행되었다. 이 비화는 허 선생님이 유언으로 남겨놓은 고백이지만, 그리스도교 낱말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말이 안고 있는 아픔과 더불어 가톨릭 한글학자로서의 허 선생님의 숭고한 사명감을 엿보게 해준다.
“우리말 큰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이런 갈등을 계기로 허 선생님은 본인이 직접 “한국 가톨릭 사전”을 만들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1981년부터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원칙상 이미 출판되어 있는 모든 사전의 새로운 낱말들은 모두 새로 편찬되는 “우리말 큰 사전”에 싣도록 규정되어 있어, “한국 가톨릭 사전”을 마련해 놓으면, 다시 “우리말 큰 사전”이 개정될 때에는 이 사전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 선생님의 “운명”과도 같은 사전 준비는 이렇게 출발하게 되었다. 그 후 낮에는 한글학회에서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한국 가톨릭 사전” 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을까, 허 선생님은 긴 시간 동안 겹쳐진 과로로 그만 건강을 잃게 되었고, 결국 1992년 간경화로 한글학회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일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건강을 돌보며 자택의 “나분다리 글방”에서 오로지 가톨릭 사전 작업에만 몰두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이 끝없는 외로운 일을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끌어안고, 14년 남짓 지났을까? 눈뫼 허 웅 선생님을 비롯하여 존경하는 은인들이 모두 연세가 많으셔서 그분들이 살아 계실 때에 일을 이루어 그분들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듯 일을 하다 또다시 건강을 잃게 되었다. 작년 3월 어느 날 아침 피를 토하고 병원에 가보니, 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동안 오로지 사전 편찬에만 매진하느라 친구들과 친척들마저 멀리하며, 오직 배달겨레의 말을 다듬는 일에만 심혈을 쏟아 왔는데...... 위암 말기라니! 선생님의 슬픈 소식을 듣고 나는 하늘이 무심하다는 심경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좇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청산에 묻혀 사는 선비처럼, 심산에서 수도하는 선승처럼, 그리스도교 낱말을 다듬는 일만을 하늘이 준 소명으로 받들고 이 외길만을 달음질쳐 왔는데...... 하느님께서는 최소한 건강은 지켜주셔야 마땅한 도리 아닌가! 무엇보다 하느님께 대한 원망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허 선생님은, 찾아온 죽음마저 “자매”로 찬미하며 받아들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위암”을 찾아온 형제처럼 받아들이고, 항암 치료도 거룩히 포기하셨다. 항암 치료를 하면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다 마칠 수 없노라며, 생명이 허락되는 한, 배달겨레가 보다 더 쉽고 보다 더 친밀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한국 가톨릭 사전”을 꼭 마무리해야 한다며, 당신의 십자가 속으로 오히려 위암을 포옹하고 들어가셨다. 선생님은 진정코 배달겨레의 그리스도교 말을 위해서 태어나신 사도이시고, 겨레의 말에 담겨 있는 거룩한 “얼”을 다듬느라 온 생애를 송두리째 산 제물로 사르신 순교자이시다. 그 후 선생님은 아무런 변함없이 일산 당신의 소박한 “글방”에서 암도 죽음도 초월하여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생명을 산화시키며 오로지 말씀께서 소명으로 주신 숭고한 우리말을 마지막으로 다듬으셨다. 홍색 순교보다 더 아름답고 거룩한 살아 있는 순교 아닌가!
그러던 8월 어느 날 암 세포가 커져 식도가 막히고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위에 튜브를 심기 위해 병원엘 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병원 사목을 하는 나병국 신부님을 만나 신부님의 간곡한 권유로 뒤늦게 항암 치료를 시작하셨다. 그렇게 1년 이상을 치료를 받으며 선생님은 병원에도 컴퓨터를 안고 가셔서 사전 작업을 계속하셨다. 지금은 체력이 약해져 항암 치료를 지속할 수 없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실 힘마저 부쳐 사전 작업을 멈추신 채 하느님의 특별한 치유의 은사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사단법인인 “한국 그리스도 언어 연구소”를 재단 법인으로 설립하기 위해 일산 나분다리 자택을 팔기 위해 내놓으시고, 지난 9월 18일 김포로 이사를 하셨다. 가진 재산이라곤 아파트뿐인데, 이를 팔아 “연구소” 재단법인으로 설립하면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그러나 선생님의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두 아들은 이미 청년이 되었으니, 스스로 자립하란다. 선생님을 따라 가족들도 십자가를 같이 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금 선생님의 감동어린 말씀이 스친다. 이스라엘 정부가 에티오피아에 기근으로 난민이 생겼을 때 에티오피아의 유다인 1만 명을 이스라엘 국민으로 받아들일 때, 이미 아프리카 흑인처럼 살빛과 체구와 습관이 바뀌어버려 외형적으로는 유다인으로 보기 어렵지만, 2000년 전 로마 제국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 이후 히브리말을 보존하고 탈무드 교육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이들이 유단인이라는 증거로 삼았다 한다. 선생님은 20여 년 전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며 길알림판이 히브리어로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히브리말 전용을 하는 그들이 몹시 부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 정도는 함께 적어 놓으면 좋지 않겠느냐며 그 나라 사람에게 제안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온 세계에 흩어져 2천여 해를 떠돌아 사는 동안 그들에게는 히브리말이 “나라”였고, “정부”였으며, “땅”이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온몸이 떨리는 감동을 받으셨다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히브리말이 사랑하는 영원한 고국이 되어버린 것처럼, 선생님은 이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홀연히 당신의 참된 “집”이요, 우리말로 믿음살이를 하는 모든 믿는 이들의 “고향”이며, 겨레의 안식처인 우리말을 다듬고 가꾸는데 큰 몫을 하게 될 “그리스도교 언어 연구소”를 위해 당신의 아파트를 아낌없이 흔쾌히 쏟아 붇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참된 기쁨이요 거룩한 행복이기에, 이 비련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은 처절하기만 하다.
사전 작업을 시작한 지 어언 25 년이 흐르면서 그동안 허 선생님은 그 일부를 “성서 낱말 사전”과 “한국 가톨릭 용어 큰 사전”으로 출판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 마쳐놓은 분량은 그 열 배가 될 지 선생님 자신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한다. 이 엄청난 일을 홀로 하면서 허 선생님은 한글학회의 우리말 전용 정신에 따라 가능한 한 가톨릭 낱말들을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새기고, 혼란 속에 있는 2,000여 개의 가톨릭 용어들을 바로 잡아놓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고유명사를 통일하는 일과 개신교와 함께 쓰는 그리스도교 낱말들을 일치시키는 일, 그리고 한국 가톨릭의 한글 운동사를 쓰는 일 등 선생님이 가셔야 할 길은 멀기만 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늘 자욱한 안개속의 그 무엇처럼 희미하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지만, 그분의 숨어 있는 뜻을 되새겨보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보잘것없는 수도자로서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나의 인연을 멀리하고, 외롭게 투병하시는 허 선생님이 일생 숨어서 준비해온 노고가 그분 생전에 빛을 보았으면 하는 소박한 개인적 소망을 하느님과 뜻 있는 분들께 사뢰어 본다. 선생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나의 가슴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사상 처음으로 구약을 우리말로 번역하시다 떠나신 선종완 신부님, 암과 투병하시느라 평생 숙원이었던 라틴어 사전을 채 마치지 못하신 허창덕 신부님, 그리고 구약을 새로 번역하셨으나 그 빛을 못 보신 임승필 신부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또다시 허 선생님도 이 신부님들의 슬픈 발자취를 따르셔야만 한단 말인가?
그동안 두 아들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한국 가톨릭 사전”을 자청해서 펴내느라 남모르게 감수해야 했던 힘겨움과 아픔들, 때로는 깊이 파고들었을 외로움들, 고비마다 찾아들었던 좌절들...... 그 수많은 사연들을 나는 헤아릴 수도, 이 비천한 붓으로 그려낼 수도 없다. 그러나 한 평신도로서 하느님과 배달겨레가 대화하고 만나는 거룩한 우리말을 순교자적 소명감을 갖고 그동안 투신해온 허 선생님을 이렇게 보내드리기에는 인간적으로 그분이 너무도 가엾다. “한국 가톨릭 사전”을 위해 인생을 온전히 불사르고, 그리스도교 언어를 위해 세상을 송두리째 내어던진 숨어있는 한글학자, 나분다리 허종진 바오로 선생님, 그는 진정 우리 교회의 자랑스런 보배요, 묻혀 있는 진주이다. 그러나 또다시 하느님께서 그를 이렇게 데려가신다면, 하느님은 정말 “잔인한” 하느님이시다. 암으로 투병하는 허 선생님께 우리가 사전을 편찬하여 그분의 품에 안겨드릴 수는 정녕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