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le Soavi의 성 프란치스코 영화 2부에서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에게 쫒기는 글라라를 피신시키려
형제들과 함께 바오로 수녀원으로 갑니다.
가는 길에 형제들이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하자
“걱정하지 마! 주님께서 다 알려주실 거야.”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바람이 정말 길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을 줄 뿐인 바람을 보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에게서 고통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프란치스코의 차이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요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주님께서 회개생활을 시작하게 하셨고
나병 환자들에게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바오로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를 나병 환자들에게 인도합니다.
유언에서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프란치스코가 누구에게 묻지 않고 기도 중에
“길을 알려 주소서. 제발 길을 보여주소서.”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글라라와 함께 지켜보던 원장 수녀가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그 응답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원장 수녀의 말대로 과연 그는 기도를 통해서 답을 얻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친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시를 받았기에
그는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어떤 제도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불듯이
성령의 은사를 정말 자유롭게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소명과 복음적 가난의 삶을 부정하는
그 어떤 세력과 기도에 대해서도
영화에서는 과격할 정도로 아니라고 자기 의사를 표명합니다.
Radicalism,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Radicalism입니다.
그의 이런 Radicalism이 드러나는 영화 속 대사들이 있습니다.
당시 교계 제도나 기존의 수도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친구가 충고하자 그는
“우리가 그분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이냐?”하고 친구의 충고를 과격하게 일축합니다.
교황에게 가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인준 받고자 할 때
“너의 꿈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배석한 추기경이 말하자
“복음이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교회는 왜 존재하는 거고,
교황과 추기경단은 무엇을 하는 거며,
자기와 형제들은 도대체 무엇을 따라야 하냐?”고
오히려 추기경단을 질책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계시 받은
복음적 가난의 삶에 대해 확신하지만
“네가 그렇게 확신한다면 교황에게 가서 말해 봐”라고
충고하는 친구의 말에
교회의 인준을 받으러 교황에게 갑니다.
진정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면
교황으로 대표되는 교회가 인준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인간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이런 확신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배석한 추기경이 “형제들의 수가 많아지면
어떻게 그런 가난을 살거냐?”하고 묻자,
“주님께서 지금까지 돌봐 주셨고
형제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를 돌봐 주시는 주님께 형제들의 수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전능하신 분께 어찌 한계가 있겠느냐?
하늘을 나는 새가 아무리 많아도 주님께서 다 돌봐주시지 않느냐?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모두 주님께서 밝히고 있지 않으냐?”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허나 추기경의 염려대로 형제들 수가 많아지니 역시 문제가 생깁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영향력이 모든 형제에게 직접 미치지 못하는 문제이고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들도 늘어나는 문제입니다.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들이
이제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대로 살 수 없다고 하고
모두가 규범으로 삼고 살 수 있는 회칙을 달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가르친 가난, 겸손, 사랑 외에 회칙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프란치스코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칙을 써주기로 하지만 자기는 책임의 위치에서 물러납니다.
프란치스코의 입장에서 회칙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도 마다 않을 수 있는 사랑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랑이 없는 회칙은 성령의 자유로운 바람을 막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
멀리 있어서 프란치스코를 직접 보지 못하거나
프란치스코가 죽고 난 뒤에 들어오는 형제에게는 지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회칙을 형제들에게 써줍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프란치스칸 운동의 교회 인준 8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프란치스칸 이상과 회칙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음을
깊이 느낍니다.
그 밖의 의미 있는 대사들.
젊었을 때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한 좌절감을 토로하는 교황에게
“어떤 때는 어둠을 저주하고 있기보다는
작은 불이라도 밝히는 게 낫습니다.”
참된 기쁨은 어떤 고통, 비난, 모욕 등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하며 그 이유로 든 말.
“고통은 우리의 유일한 힘이고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베르나르도보다 나은 목수가 되게 해주셔서.
주님 감사합니다.
베드로 형제의 답답함을 참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복음과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옷을 홀딱 벗어주고 오는 쥬니뻬로가
추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벗어주었다고 대답하니
‘우리도 가난하다’고 한 형제의 말에 대해 쥬니뻬로가 한 말.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좋아서 가난한 거고
그 사람은 아니잖아....”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에게 쫒기는 글라라를 피신시키려
형제들과 함께 바오로 수녀원으로 갑니다.
가는 길에 형제들이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하자
“걱정하지 마! 주님께서 다 알려주실 거야.”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바람이 정말 길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을 줄 뿐인 바람을 보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에게서 고통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프란치스코의 차이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요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주님께서 회개생활을 시작하게 하셨고
나병 환자들에게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바오로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를 나병 환자들에게 인도합니다.
유언에서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프란치스코가 누구에게 묻지 않고 기도 중에
“길을 알려 주소서. 제발 길을 보여주소서.”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글라라와 함께 지켜보던 원장 수녀가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그 응답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원장 수녀의 말대로 과연 그는 기도를 통해서 답을 얻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친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시를 받았기에
그는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어떤 제도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불듯이
성령의 은사를 정말 자유롭게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소명과 복음적 가난의 삶을 부정하는
그 어떤 세력과 기도에 대해서도
영화에서는 과격할 정도로 아니라고 자기 의사를 표명합니다.
Radicalism,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Radicalism입니다.
그의 이런 Radicalism이 드러나는 영화 속 대사들이 있습니다.
당시 교계 제도나 기존의 수도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친구가 충고하자 그는
“우리가 그분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이냐?”하고 친구의 충고를 과격하게 일축합니다.
교황에게 가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인준 받고자 할 때
“너의 꿈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배석한 추기경이 말하자
“복음이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교회는 왜 존재하는 거고,
교황과 추기경단은 무엇을 하는 거며,
자기와 형제들은 도대체 무엇을 따라야 하냐?”고
오히려 추기경단을 질책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계시 받은
복음적 가난의 삶에 대해 확신하지만
“네가 그렇게 확신한다면 교황에게 가서 말해 봐”라고
충고하는 친구의 말에
교회의 인준을 받으러 교황에게 갑니다.
진정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면
교황으로 대표되는 교회가 인준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인간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이런 확신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배석한 추기경이 “형제들의 수가 많아지면
어떻게 그런 가난을 살거냐?”하고 묻자,
“주님께서 지금까지 돌봐 주셨고
형제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를 돌봐 주시는 주님께 형제들의 수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전능하신 분께 어찌 한계가 있겠느냐?
하늘을 나는 새가 아무리 많아도 주님께서 다 돌봐주시지 않느냐?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모두 주님께서 밝히고 있지 않으냐?”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허나 추기경의 염려대로 형제들 수가 많아지니 역시 문제가 생깁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영향력이 모든 형제에게 직접 미치지 못하는 문제이고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들도 늘어나는 문제입니다.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들이
이제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대로 살 수 없다고 하고
모두가 규범으로 삼고 살 수 있는 회칙을 달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가르친 가난, 겸손, 사랑 외에 회칙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프란치스코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칙을 써주기로 하지만 자기는 책임의 위치에서 물러납니다.
프란치스코의 입장에서 회칙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도 마다 않을 수 있는 사랑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랑이 없는 회칙은 성령의 자유로운 바람을 막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
멀리 있어서 프란치스코를 직접 보지 못하거나
프란치스코가 죽고 난 뒤에 들어오는 형제에게는 지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회칙을 형제들에게 써줍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프란치스칸 운동의 교회 인준 8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프란치스칸 이상과 회칙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음을
깊이 느낍니다.
그 밖의 의미 있는 대사들.
젊었을 때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한 좌절감을 토로하는 교황에게
“어떤 때는 어둠을 저주하고 있기보다는
작은 불이라도 밝히는 게 낫습니다.”
참된 기쁨은 어떤 고통, 비난, 모욕 등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하며 그 이유로 든 말.
“고통은 우리의 유일한 힘이고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베르나르도보다 나은 목수가 되게 해주셔서.
주님 감사합니다.
베드로 형제의 답답함을 참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복음과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옷을 홀딱 벗어주고 오는 쥬니뻬로가
추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벗어주었다고 대답하니
‘우리도 가난하다’고 한 형제의 말에 대해 쥬니뻬로가 한 말.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좋아서 가난한 거고
그 사람은 아니잖아....”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일 뿐,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사부님의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사부님처럼........ 감사합니다.
사부님이 보여주시는 진정한 기쁨을 되새겨봅니다.
오늘날 현 시점에서 우리의 형제애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첫째,공동체속에서 함께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둘째, 사랑으로 형제애를 나누고 있을까! 셋째, 그리스화가 되려 하면서도 순간적인 caro로 죄와 악습에 사로 잡히지 않았을까! 중세기 당시 교황께서 프란치스코 성인 곁에 다가가서 전 날 밤 꿈 꾸었던 것을 이야기 하기 전, 당신도 교회 쇄신을 복음으로 변화 시키고 싶었했지만 당신의 능력 한계를 이야기 하시며 흘리시던 그 모습에서 성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고픈 말은 우리도 성자는 될 수 없지만 우리가 지녀온 죄와 악습에서 벗어 나려고 하여야겠다고 느꼈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은 우리가 말은 하기 쉬워도 사울에서 바오로가 되기까진 눈물겨운 당신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린 삶 속에서 말만 앞세우지 나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노력을 했을까! 프란치스코 성인은 복음으로 가슴이 에이고 부풀어 오르는 듯한 팽창감을 느꼈으므로 말씀의 생명의 줄을 잡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몸은 껍질일 뿐 내면의 그 분이 없음은 고통 그 자체라고 본다.
변화된다는 것은 그 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못 할 것도 없다고 본다. 늘 사부님처럼 가난한 그 자체로 육화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 또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분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안식처가 있으므로...
유식한 형제들이 회칙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을 때 나 또한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물론 그 때 회칙을 만들어서 삶의 지침서가 되고 있지만, 신앙인으로서 그것도 순례자,나그네 영성을 살아가는 자들이면서 굳이 회칙이 필요 할 까 생각이 들었다.
보고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주장을 펼치고 싶은 것, 때론 감싸줘야 할 때 내 몰아치는 양심은 진정 가난을 살고 싶은 자들의 모습일까 싶다. 돼지 우리에 빠져서 온 몸이 오물 투성이가 되어도 다들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만 앞섰지 돼지오물에 온 몸이 뒤 범벅이 되었다고 내치는 형제들은 없엇다. 삶의 단순함과 소박함이 우선적이라고 생각이 든다. 가난은 없는 상태가 가난이라고 했다. 없기에 시냇가에 묻혀 물결에 떠 내려가는 작은 조약돌도 함께 물길 따라 아래로 라래로 나들이 가면 세상을 두루 다니며 거치는 곳마다 작은 역활의 사랑을 나눠 주고 간다. 우린 800주년을 맞아 사랑의 실천자가 되었으면 한다. 강함이 드러나는 세상보다 연약함으로 이겨내는 아름다운 이 세상을 ,시냇가의 작은 조약돌이 떠 내려가는 물결 따라 나누어 주는 보이지 않는 소박하고 작은 사람이 되어 사부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어떨까 한다.
했는데 그회칙의 압박때문에 베드로는 죽고 어절수없어 프란치스코가 만들었다
회칙을 만들사람은 프란치스코밖엔 없다는것은 회칙은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하는 생각들었읍니다
쥬니뻬로 형제님의 두번 씩이나 가난한이에게
수도복까지 홀딱 벗어 준 모습을 보시고
사부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회칙이라 하시고
마지막 장면에서 수도복을 입은 쥬니뻬로님의
모습을 보신 사부님께서 오늘은 옷을 입고 있네 하시니
아직은 옷을 입고 있다 하니 기회가 오면
또 가난한 이에게 옷을 벗어 주려는 사랑 !
그 사랑은 모욕도,고통도,부끄러움도 없고 자유로움 만이 있고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열정으로 가득 차 행복 만이 있을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