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muttergottes jesuskind nahrt)
작 가 : 미상
제작 연대 : 16세기
소 재 지 : 독일 킬부르그 순례 성당
오늘 우리 국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야고보 콤포스텔라의 순례지만 아니라 중세 유럽인들은 자기들의 처지에 맞는 순례지를 개발해서 순례했는데, 이웃 유럽 국가와 접경 지대인 이 곳은 지역 신자들이 많이 순례하던 알찬 성지가 있었다.
이 성당은 순례자들이 많이 순례하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듯 작은 마을 규모에 어울리는 성당이나 내부의 모든 것은 설립 당시와는 달리 안목이 있는 순례자에 의해 봉헌된 성 미술로 기품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모 성지이니 르네상스 예술의 균형미를 완벽히 보이는 성모상과 예수님의 일생을 설명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성화로 읽을 수 있는 시각적 영상물인 스테인드 글라스 등 작지만 어디 내어 놓아도 빠지지 않는 정갈한 성지의 모습이다.
당시 유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작한 비트루비우스(Virtubius) 라는 인체도에 넋이 빠져 모든 것이 조화와 평화를 상징하는 제작이 유행했던 시기이며 이 성당 역시 이 정신을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들어가면서 왼쪽 현관 부분에 이 성당의 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모상이 하나 모셔져 있는데, 바로 이 작품이며 “젓을 먹이시는 성모님”으로서 벽감에 모셔져 있다.
이 성상엔 작가도 제작연도도 없고 그냥 16세기의 작품으로 만 기억되고 있다.
16세기라면 독일에선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시기였고 교회 역시 개신교와 분열됨으로서 사회적으로도 큰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이 작품은 솜씨로 보아 예술적인 표현으로는 아주 낮은 수준인 작가가 만든 것이며 신심이 돈독한 사람이 순례를 통해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보은의 마음으로 봉헌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불교의 사찰에도 작가를 알 수 없는 탱화나 법당 외벽에 그려진 심우도 중에 절을 찾아와 스님들의 환대로 며칠 기식했던 사람이 보은의 마음으로 남긴 작품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런 아류에 속하는 것이다.
우선 전체 인상이 다른 성상이 지니고 있는 르네상의 예술의 성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모습이다.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성모님의 모습은 영락없이 당시 이 지방에 살고 있던 촌부의 모습이다.
소와 양을 키워 젖을 짜서 가족들의 영양을 지킬 낙농 제품을 만들고 밭에서 땀 흘리며 밀 농사를 짓던 이 지방 촌부들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농촌 촌부에게서 볼 수 있는 색체 처리 역시 세련되지 못했다. 성모님의 인성과 신성을 표현하는 전통 색깔인 푸른 색과 붉은 색에 금박을 뒤씌운 모습은 아무래도 세련되지 못해서 성당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성모님에 대해 전통적으로 각인되어온 성스러운 모습이나 르네상스에 이어지면서 이루어진 세련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웃 촌부 하나를 성당에 모셔 둔 모습이다.
이런 새로운 성모상의 등장은 신심 표현의 새로움을 시작하고자 하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신심의 파격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신심은 항상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의해 시작되기에 항상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하향식 표현이 대종이었다.
성모님에 대해서도 가장 먼저 공식화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고 우리 신자들은 항상 위를 바라보며 교회의 결정에 충실히 따른다는 정신으로 살아왔기에 신심의 표현이 항상 판박이같이 로마의 정신을 반복 재생하는 것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신심의 목표가 본받음보다 우러러 경배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게 되는 예가 많았다. 이런 태도의 성모 신심은 자연스럽게 기적과 연관 지어지게 되어 현실과는 유리된 신심이 되었다.
그러나 드물게 어떤때 예언적 사고를 지닌 평신자나 성직자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신심, 로마 지향이 아닌 자기 삶의 현장에서 신앙체험을 바탕에서 신심 행위를 시작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런 경향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근래에 와서 토착화라는 표현으로 시대 지역 정서에 담은 호의적인 것으로 표현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 성모님은 바로 이런 방식 신심의 대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모님의 얼굴, 머리 모습, 어디하나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인 성모님이 촌부답게 젖가슴을 열고 아들 예수에게 젖을 먹이고 계신다.
성모 신심은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라는 성모님의 위엄과 신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어 시대를 흐르면서 성모님의 인성 특히 모성을 강조하는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고 성모님의 인간적 모성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성성을 발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은 모성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이라는 이 주제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자연스럽게 연결고리를 만들게 만들게 만들었다.
이것은 교회 교도권이 제시하는 성모 신심의 아쉬운 면을 보완해서 성모 신심이 기적에 매달리거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여왕과 같은 숭경의 대상이 아닌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하느님의 모성을 보이는 후덕한 어머니 상으로 정착시켰다.
성모 신심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꼭 같은 삶의 현장을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교의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삶의 현실에서 보인 좋은 모습이 되었다.
교회가 자기가 지닌 신성을 증거하기 위해서일까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너무 신비화하면서 신앙을 현실과 점점 유리시키는 반사작용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성모상의 표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참으로 건강한 신심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리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성모 신심 뿐 아니라 성인 공경에 있어서도 교회의 현실은 문제인 것은 이들을 특출한 존재로 강조하면서 이들을 통한 신심이 하느님께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그 성인에 대한 개인적 신심에 머무는 예도 많고 특히 성모 신심의 아쉬운 면도 이런 면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특출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를 너무 닮은 인간다운 인간 모습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처럼 성모님도 바로 우리 이웃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게 가장 교회 정신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그동안 우리와 동떨어진 어떤 여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시킴으로서 성모님의 존재를 성서적인 인간상과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인데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좀 투박스럽긴 해도 대단한 예언성을 띈 작품이다.
구약의 영웅인 모세를 신명기 저자는 너무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으며 모세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의 무덤이 성지가 되고 모세가 경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인데,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어떤 신앙의 영웅을 양산하는 것은 동기가 어떠하든 크리스챤 신앙에 혼돈과 왜곡을 일으키는 일인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오늘 교회에도 필요한 신앙의 중용을 찾는데 대단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제도적인 종교는 매력을 잃고 이상한 신형 종교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제도적인 교회 중 가장 힘 있는 우리 교회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기에 자기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공경을 강조하는 성인들은 순교자가 아니면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영웅급 인간이기에 거리감과 함께 주눅을 느껴 진작 신앙을 포기하고픈 유혹을 받게 된다.
아기 예수님에게 젖을 먹이시는 촌부와 같은 모습의 성모님은 이 성당을 순례하는 신자들에게 복음적 친밀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순례를 통해 성모님의 젖을 먹고 성장하는 아기 예수처럼 성당 전체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시각적 하느님의 말씀의 젖을 한껏 먹고 좋은 크리스챤으로 성장해야 겠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