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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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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욥과 세 친구들(1461)

    가  :  쟌 푸게 (Jean Fouquet : 1420- 1480)

    기  :  목판 ( 21 X 15cm)

소 재 지 : 프랑스 Conde chartilly 미술관


며칠 전 지하철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개신교 전도사를 발견했다. 요즘 지하철 분위기는 이런 사람들을 불쾌한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가 더 많은 가운데 자기 수준의 선교 사명을 다하기 위해 혼자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실망과 의문이다


왜 세상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악과 불의와 고통이 있는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세상의 고통이나 악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방관하고 계시는가?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당하는 엄청난 고통이 엄연히 존재하고 착하기에 오히려 누명과 오명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착한 사람들을 헐뜯는 찌라시 수준의 저질 내용의 글들이 쉼없이 오르고 있다.


선을 강조하는 종교 집단 안에서도, 어떤 때 그것이 인간 집단이란 이유로 핑계를 댈 수 있는 추악한 모략중상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 안에서도 악이 득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인간들 역시 이 세상 인간 중에 하나이라는 관점이 강조되면 더 할 말 나위가 없다.


종교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말은 화려하면서 사는 모습은 일반 사회인과 별 차이가 없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말문이 막힐 때도 있다.

이런 반면에 하늘에서 천벌이 내렸으면 하는 그런 인간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것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라는 의문은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는 종교인들에게는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고 하면서 전적으로 착하시지 않기에 세상의 악에 대해 관용을 베푸시는가?


하느님이 상선벌악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느님이 분명히 처신하신다면 성당에 레지오 조직의 활동이나 지하철에서 전도자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런 저런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지 않아도 성당이나 교회에는 많은 신자들로 넘치게 될 것인데, 현실은 이와 다르게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기에는 하느님이 선하신 분으로 믿기에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으니 믿고 싶어도 신앙에 대한 회의가 생기게 된다.


즉 선교는 크리스챤들의 기본 사명이면서도 선교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제공을 착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고, 악인들을 보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현실적 모습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왜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욥기이다. 욥기는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고통과 악, 불의에 대한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욥기는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소재가 되었다. 하느님과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와 파우스트의 등장으로 악에 대한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


fouquet_job_mestvaalt_grt.jpg


작가는 프랑스인으로 이태리에 가서 르네상스 작가로서 큰 영향을 주고 있던 피렌체의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에 심취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키운 후 고국에 돌아와 당시 예술의 주제였던 성화를 집중적으로 제작하면서 당시 프랑스 왕들을 위시하여 많은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욥기의 내용 중에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오면서 그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잘 견디고 있던 욥의 영혼이 자기의 고통이 죄값으로 여긴다는 친구들의 암시로 혼란에 빠지게 되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욥이 이 혼란을 거치면서 욥은 자신의 고통은 그 원인을 따지기 보다 침묵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길임을 고백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마무리 된다.


하느님의 뜻을 너무도 완벽히 실천했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축복을 받은 친구 욥이 자신의 행업과는 무관하게 사탄과 내기를 하신 하느님의 뜻에 의해 받고 있는 처참한 고통을 바라보면서 친구들은 마음이 흔들린다.


인간적인 우정으로 욥을 위로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교회가 계속적으로 강조해온 상선벌악이나 인과응보의 정신에 세뇌된 친구들은 친구가 이런 것을 당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자기들이 모르는 죄를 친구가 지었으니 친구의 고통은 바로 자기 죄값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복잡한 마음으로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


실은 친구들이 욥의 고통을 보며 망연자실하는 욥은 비길 수 없는 준수하고 고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재산과 자식들까지 모두 잃고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1.21) 라고 응답했고, 몸이 썩어 문드러져 잿더미 위에 앉아 아내의 폭언과 조롱을 받으면서도“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 라고 응답했던 욥이었다.

 

이렇게 강건한 믿음으로 일관했던 욥의 모습은 친구들과 논쟁을 시작하면서 점차 하느님께 무죄함을 항변하며 저항하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 세 친구는 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겉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얹고 목 놓아 울며 이레 동안 한마디 말조차 못한 채 곁을 지키고 있다.


성서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욥에게 가서 그를  위로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이 멀리서 눈을 들었을 때 그를 알아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 놓아 울며, 저마다 겉옷을 찢고 먼지를 위로 날려 머리에 뿌렸다.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욥기 2,11-13)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작가가 줄 수 있는 해답 보다는 욥을 바라보라고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교회는 착한 사람이 자신의 착함 때문에 세상 삶에서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도와 노력을 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에 와서 구약의 한계를 뛰어넘을 고통의 신학을 그리스도께서 무죄한 상태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에서 해답을 찾도록 초대하고 있다.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위해 여러 종교는 많은 고심을 해왔고 자신의 죄값, 신앙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의 과정 등 여러 가지를 제시했으나 어느 것 하나 시원한 해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가 고심했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던 해답이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이 분명히 제시되었다


예나 오늘이나 사악한 세상은, 죄많은 인간들이 모인 집단인 교회에서는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인간들이 항상 양산되고 있다.


욥의 모습을 예수의 제자들이 되고픈 선량한 사람이 어떤 양상으로든지 그가 속한 집단에서 받아야 할 필수적인 현실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교회는 이런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야 하는 신자들에게 이런 고통의 의미를 찾아 고통에 넘어지지 않고 성숙할 수 있는 신앙의 지혜를 제시한 것은 다행이다.

몸체 있는 십자가를 제단에 걸고 있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크리스챤들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라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시각적으로 크리스챤이 무죄한 상태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외면하심의 표징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가장 가까이 있는 크리스챤의 모습이라는 것으로 고통이 넘어짐의 걸림돌이 아니라,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신념으로 견디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디딤돌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욥의 절규처럼 크리스챤들도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십자가에서 절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처지를 원망할 수 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의 이런 절규가 부활로서 응답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자신이 겪는 이유를 모르는 고통에서 꺾이지 않고 희망을 지닐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처지가 욥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중상모략이나 음모에 의해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신앙의 스승이신 주님의 삶 역시 우리 못지  않는 억울한 삶이었음을 알리며 고통이 하느님이 우리를 버린 표징이 아닌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체험임을 알리며 위로를 받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세 명의 친구처럼 세상에서 교회에서 수도원안에서 왜 착한 사림이 이토록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의 근원으로서 욥이 있음을 우리가 보면서 자기 삶의 고통의 부조리가 결코 크리스챤 삶에서 너무도 당연히 여겨야 한 현실의 하나임을 알고 신앙 안에서 인내하고 승화시킬 것을 알리고 있다.


라듐을 발명해 노벨상을 받은 폴란드의 퀴리 부인은 좋은 신앙인으로 있다가 가난으로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신앙을 버렸고 그 후 그녀는 신앙을 찾지 않았다.


박봉의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의 수입으로 가난에 벗어날 수 없었던 퀴리 부인은 명민한 머리로 프랑스에 유학 와 솔봉느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항상 변치 않았던 꿈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 돈을 벌면 고생하는 어머니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너무도 평범하면서도 순수한 딸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는 학자로서 성공해서 자기 기대보다 더 어머니를 안락하게 모실 수 있었을 때 어머니는 가난에 찌들려 이 세상을 하직했다.


과학적 두뇌가 탁월했던 퀴리 부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자기가 어머니에게 지닌 그 순수한 마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가난으로 그토록 찌들린 삶을 살던 어머니를 그 딸이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을 때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전능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에 나는 종교를 떠나겠다.


욥기의 저자는 퀴리 부인이 고통 속에서 버린 신앙은 그래도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면서도 지녀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욥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알리고 있다.


이것으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모든 것에 다 시원한 해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괴로운 갈등 속에서 욥처럼 절규하면서도 살아야 할 삶의 당위성은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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