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1630)
작 가 : 렘브란트(Rembrand, van Rijin, 1606-1669)
크 기 : 목판 유채 70.5 X 90cm
소재지 :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작가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각축전을 벌리던 시기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크리스챤 작가로서의 복음적인 위치를 구축한 화가이기에 그에겐 어떤 종교의 특징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의 특징만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분 없이 많은 크리스챤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 성서의 다음 구절을 그린 것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갈릴레아에서 당시 민초들에 속하는 어부들이나 농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기 쉬운 비유로 복음을 전하셨다. 문맹의 수준에서 지성적 이해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비유를 통한 방법은 가장 복음을 정확하면서도 쉽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주님께선 마태오 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물의 비유, 숨겨진 보물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셨는데, 이 작품은 바로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오늘과 같은 화폐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보물로 여겨 전쟁이나 어려운 시기가 되면 이것을 땅에 묻어 보관했으며, 이것을 묻어둔 사람이 죽거나 묻은 자리를 잃어버리고 지내다 우연히 엉뚱한 사람에게 이것이 발견되면서 횡재를 하는 예가 예나 오늘에나 있었다.
특히 값진 골동품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우연한 인연으로 발견되어 화제거리가 되는 예가 오늘날에도 종종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이유로 묻혀 있던 보물을 찾은 농부를 통해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인 하늘나라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수님 당시 어떤 농부가 우연히 빈 땅을 파다 그곳에 땅주인도 모르는 엄청난 보물이 묻힌 것을 발견하고는 이것을 몰래 다시 덮어두고 땅 주인에게 가서 그 땅이 자기에게 필요하니 팔라고 하면서 시가보다 상상할 수 없이 높은 가격으로 흥정하자 땅에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모르는 주인은 시원하게 이 땅을 팔게 되고 이것을 산 농부는 그 땅에 묻혀 있는 보물을 알기에 크게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당시 가톨릭과 격렬히 대비되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작품의 성격을 반 가톨릭적으로 표현치 않고 나름대로 자기가 이해한 복음으로 표현했기에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폭넓고 성숙한 신앙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그의 성화는 가톨릭의 여러 상징이나 다른 부수적인 배경 설정과 같은 중후한 전통이 표현하지 못했던 신선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 성화에 등장하는 후광이나 다른 신비적인 상징도 다 거부하고 당시 네덜란드 농촌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농부의 모습 안에서 성서의 내용을 표현했다.
작품에 나타난 농부는 오른 손에는 삽을 들고 왼손에는 광우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농부임을 알 수 있다. 삽을 쥐고 있는 팔의 근육이나 몸통의 근육은 그가 얼마나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농부인지를 알리고 있다.
이것은 당시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이 강조하던 근면과 절제된 삶의 상징이다. 당시 네덜란드 개신교의 창시자인 요한 칼빈은 “신의 예정설”이란 독특한 신학 이론을 제시하고 강조했는데, 이것이 네덜란드 개신교파의 대종이었던 칼빈주의 영성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은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앙과 선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렇나 이런 이론은 또한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혹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매일의 삶 안에서 자기가 구원받을 사람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 의혹을 느낄 수 있는데 칼빈은 신의 예정설이라는 이론을 통해 이 면을 설명했다.
이것의 보완 장치로 칼빈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사람의 표징으로 근면한 삶의 태도가 필수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은 특히 일상생활에서 근면성이 단순한 생활 태도나 습관이 아닌 영성 생활의 핵심임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화란 사회의 경제적 성장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근면을 강조하는 생활 태도로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사치 생활이 시작되고 반대로 책임 없이 게으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자 이들의 근면한 삶의 양식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것을 고치고 예방하기 위해 개발한 예술 장르가 바로 바니타스(Vanitas)라는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생산하면서 근면에 대한 깨어있는 태도를 신앙의 차원에서 강조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하늘 나라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차원 이상으로 근면한 삶의 태도가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삶의 질도 높힐 수 있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열심히 산다는 것은 단식이나 희생 혹은 특별한 기도를 많이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충실임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이 농부가 우연히 일확천금의 보물을 찾은 것이 아니라 힘겹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보물을 발견하게 되었음을 강조함으로서 근면한 삶이 하느님의 은혜를 얻는데 가장 좋은 조건임을 표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개신교 영성의 특징인 댓가성 축복의 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개신교 신자들이 좀 무리가 되기도 하지만 철저히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 역시 이 근면의 결실을 하느님께 바칠 때 하느님께서 축복으로 되돌려 주심을 믿기에 가능한 것이다.
흔히 개신교라고 불리는 프로테스탄트는 여러 분파로 나뉘는데 이 책에서는 이들 중 하나였던 칼뱅의 예정설과 직업 소명론을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시키고 있다.
칼뱅의 예정설은 우주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건 등은 모두 하느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인간이 구원을 받거나 못 받거나 모두 신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는 주장이다.
따라서 신에 의해 구원이 예정된 사람은 그 증거로 근면하고 성실하며 이를 바탕으로 부를 쌓는 것은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봤고 이것은 당시 상공인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며 작은 땅 덩어리에다 많은 부분이 바다 수면 보다 낮은 열악한 네덜란드를 부강한 국가로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다.
화면 중앙에 한 남자는 땅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다. 화면 오른쪽에는 바닥부터 뒤쪽 깊숙이 파인 땅속에 금, 은그릇을 비롯해 다양한 귀한 물건들이 매장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남자가 땅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오른손은 삽을 들고 있고 왼손은 거친 빈 광주리를 쥐고 있다. 남자의 오른쪽 위에는 물병과 음식을 넣는 광주리가 놓여 있다.
이것은 이 농부가 우연스럽게 지나가다가 노다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혼신의 노력으로 투신하는 삶을 살았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이 농부의 횡재는 요행이 아니라 자기 땀의 결실임을 알리고 있다.
이 작품에 표현된 남자의 얼굴은 화가 자신의 분신이다.
렘브란트는 신앙적인 면에서 건강한 개신교 신자들처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자기 자신을 작품속에 등징시킴으로서 자신을 말씀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는 일생을 통해 많이 그린 자화상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나 다른 작품에서도 자신을 모델로 등장시키는데 이것은 자신이 건강한 크리스챤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깊은 열망의 순수한 표현이다.
이 작품에서도 렘브란트 자신을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젊은 시절이었던 작가는 충실한 작품 활동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화란 사회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자신의 성공이야 말로 이 농부와 같은 근면한 삶의 결실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은 이 밭의 보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큰 이익이 된다는 기쁨의 확신 보다는 불확실성의 의혹 속에 순간 걱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 속에서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진 형상처럼 그의 심리상태도 갈림길에 서 있다.
이것을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크리스챤이 투자해야 할 것 역시 대단한 것이기에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신앙을 위해 투자해야 할 것에 대한 인간의 주저와 망설임을 겪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고 있다.
또한 자기 인생을 전부 걸 정도로 귀한 하느님 나라는 ‘좋은’ 것이지만 ‘숨겨져’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 이 농부와 같은 근면과 정직을 생명으로 여기며 산다는 것을 스스로를 사회생활의 낙오자로 만들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심이나 불안감에 빠질 수도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크리스챤 삶은 가장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양면에 있기에 미래를 측정할 수 없는 의혹의 면이 있으나 이 농부처럼 우직스러운 삶의 태도로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자기가 해야할 삶의 모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이 묻혀진 보물을 찾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크리스챤들은 하느님 나라를 굳게 믿으면서 농부와 같은 과감한 투자를 할 때 현세 삶으로 부터도 큰 이익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가톨릭 교회 보다 더 현실적인 복을 강조함으로서 신자들을 매혹시키는 방법으로 이 복음 말씀을 실천하길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겸손 인내 항구 충실과 같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말로서 영성생활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처럼 근면과 절약과 같은 현실 삶에서의 덕행을 강조함으로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에 서로 다른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작품은 개신교 영성의 시각에서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제시하면서 신앙 안에 굳은 희망을 두고 현실의 삶을 근면이라는 충실성으로 살아가는 개신교 윤리의 풋풋한 면을 제시함으로서 복음적 삶의 풍요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