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칼라 풀라치다의 무덤 천정 (470)
소재지: 이태리 라벤나.
이태리에서 가장 긴 강인 포(Po)강이 흐르는 북 이태리 평야의 동쪽 끝에 라벤나(Ravenna)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 작은 마을은 한때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행세하던 도시였으며 유럽에서 드물게 모쟈익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성당들이 남아 있어 과거의 영화를 일깨우고 있다
성 비탈레(Vitale) 성당 성 아폴리나리스 누오보 (Apolinaris Nuovo)성당 등은 서로마제국의 화려했던 분위기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산 비탈레 성당 북쪽 공터 구석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창고처럼 보이는 조그만 벽돌집이 있는데, 서로마 제국의 공주였던 갈라 풀라치디아(Galla Placidia)의 무덤이다
어두운 건물 안에는 석관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인 소박한 무덤이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설화석고로 만든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보이는 내부의 모쟈익에 압도되어 수수하다 못해 초라한 인상을 주던 외부모습과 전혀 다른 세련된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게 된다
이 작품은 관 하나가 덩그렇게 놓인 무덤 내부의 천정 모쟈익 이다.
영원한 제국으로 믿었던 서로마 제국이 이방인의 침략으로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 18살의 황제인 발레리아노 2세는 섭정으로 있던 어머니와 세 명의 여동생을 데리고 오늘의 이스탄불에 있는 동로마 제국수도인 콘스탄티노폴로 피난와서 은신하게 된다.
당시 상처하고 홀아비로 지내고 있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피난 온 칼라 공주와 사랑에 빠져 끈질기게 구혼해서 결혼하게 된다.
황제 나이가 당시 40대였으니, 아직 아릿다운 나이였던 공주 편에서 보면 그리 탐탁치 않는 결혼을 하면서 칼라 공주는 위험을 피해 동로마로 피난 와야 했던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전철을 밟게 된다
그럭저럭 부부로 살아가던 남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 후 풍전등화의 운명이 된 로마제국은 서고트족에게 점령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과부인 공주는 포로의 신세가 되는 비극의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로마제국을 점령한 서고트족의 황제 알라리크의 동생과의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결혼을 하게 되고 남자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나 이 아들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남편 역시 정적에게 살해당한 후 잠시 동안 노예 취급을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이 수모도 평정속에 받아 들이면서 흔들리지 않는 기품을 보였다.
라벤나로 돌아온 기품있고 아릿다운 그녀에게 새로운 구혼자가 생기자,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다시하게 되고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남편 역시 두 아이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나자 또 과부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 결혼에서 얻은 아들 발레티누스 3세를 황제로 앉히고 섭정으로서 25년을 일했다.
이때 로마제국은 감당할 수 없이 기우는 시기였으나 다행히도 너무도 평화스러웠다
이민족의 침공도 반란도 폭동도 없이 ,폭풍 전야의 처지에서도 모처럼 조용한 시기를 살 수 있었고 450년 60세로 삶을 마감하면서 방부 처리된 채 이 무덤에 안장되게 되었다.
이 무덤은 너무 장려하고 화려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면서 과도한 경비 지출로 국운을 기울게 만들었던 인도의 타지마할 처럼 화려한 것도 아니고,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무덤처럼 거대한 것과도 전혀 다른 것이다.
조그만 공간에 너무도 파란만장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한 고귀한 여인의 삶이 압축된 모습으로 누워있기에 무덤 자체가 주는 멧세이지가 대단한다.
그가 섭정으로 있는 동안, 대교황으로 칭송되는 레오 교황이 지도자로 있었기에 제국을 그리스도교화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칼라는 이 어수선한 와중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로마 제국의 지도자 처럼 예술과 문화에 대한 많은 투자를 했다.
오늘날 이태리가 유네스코 문화재가 가장 많은 것은 이런 로마 기질의 자부심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도 , 비록 독재자라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은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었기에 밀라노에는 폭군이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코틱 양식의 정수인 밀라노 대성당이 건축되었고, 우르비노(Urbino)에는 전쟁 청부업자였던 페데리코의 집념에 의해 역사에 남을 아름다운 예술품을 남길 수 있었다.
칼라 공주의 이런 열정어린 공적을 상기시키듯 무덤은 상하 좌우가 서로 같은 그리스 십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모쟈익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쟈익이란 다양한 색상의 조그만 돌을 벽에 부쳐 장식하는 회화 기법이며 기원 3 세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주인공이 살았던 라벤나의 예술가들에 의해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조그만 이 천정을 바라보노라면 무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해방되어 별이 총총한 밤하늘로 착각하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에서도 신앙으로 다듬어진 고귀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이 천정 양식은 그후 유럽 전체로 퍼지면서 중세기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의 천정도 회반죽을 사용하는 프레스코이지만 이 기법을 사용했을 만큼 천상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모델이 되었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한다는 정성으로 했기에 무명으로 남아있고 무덤의 주인공만 알려지게 되었으나 작품성 못지 않게 주인공의 삶이 연상되면서 더 깊은 생각을 일깨우는 곳이 된다.
이 무덤은 그 안에 누워있는 주인공의 삶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 의탁하며 감당할 수 없이 닥치는 역경의 실타래를 신앙으로 풀어나갔던 한 여인의 고귀한 인품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서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곳이다
이 천정 모쟈익 외에도 공간을 장식하고 있는 소품들은 규모는 작으나 대단한 아름다움을 보임으로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 무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란 평가를 내리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