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담의 창조(1508- 1512)
작가: 미켈란젤로 브루나요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 1564)
크기 : 프레스코
소재지 바티칸
1786년에 이태리를 여행한 독일의 대문호 괴태( J.V. Goethe)는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시스티나 경당을 보지 않는 사람은 한 인간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은 작가는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에 4년여에 걸쳐 천장을 프레스코로 가득 채웠는데, 제자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이 대작을 완성했다.
전체는 천지창조를 주제로 한 구약 창세기 내용 중 아홉 장면과 , 이를 둘러싼 7명의 예언자와 5명의 여자예언자과 구약의 중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 이 작품은 왼편에서부터 4번째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이 자신이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의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라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당시 예술가로서는 예외적일 만큼 성서에 대한 대단한 이해가 있었다.
작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성경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서, 어떤 때는 그를 상대했던 성직자들까지도 그의 성서에 대한 해박하고 정확한 지식에 경탄과 놀라움을 표시했을 만큼 예술가로서 그의 성서 이해는 당시로서는 탁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성경을 대할 때 교회의 해석이나 규정이라는 제한된 틀에 메이지 않고 예술가적 자유의 태도를 보였기에 ,당시 르네상스 운동의 영향으로 유럽을 풍미하고 있던 이교도적 성격과 성서적 성격을 절묘히 조화시켜 당시 사람들에게 큰 공감대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문화의 복음화를 성취했다.
작가는 구약성서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태초적 사건들은 정확한 표현을 곧 진리로 생각하는 현대적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 인간 삶에 교훈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계시가 담긴 것으로 보았다.
구약의 출애굽에 나오는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 수 없다고 엄명하고 있으며 ,이것은 구약을 전체로 믿는 유대교에게 하느님을 표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던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출애굽 20: 4)
이 구절에 대한 상황적 이해가 없이 편협한 해석을 내린 오늘 이 땅의 개신교 대종도 바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여 하느님 표현에 대해 신경질적일 만큼 부정적이며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작가는 이미 400여년 전 이런 답답한 경계를 대범하고 시원스럽게 허물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성서 이해에 정확한 바탕을 둔 예술 작품의 걸작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인간 창조라는 너무도 심오한 내용은 언어를 통해서만이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음을 굳게 믿던 시기에 작가는 대담하게도 예술을 도구 삼아 언어가 줄 수 있는 감동 이상을 표현했다
작가는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얼굴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얼굴은 감상자들의 마음을 모두 빨아들이는 진공 청소기와 같이 강렬한 힘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본능적일 만큼 자연스럽게 성스러움을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의 얼굴은 현대에서 자주 표현되어 우리 시각에 너무도 익숙한 곱상스러운 모습의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공포를 일으킬 만큼 무섭고 숭엄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약성서의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격렬하게 분노하시며 천둥과 번개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신 하느님을 작가는 여기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소리로 신비롭게 천둥을 치게 하시는 분 ,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욥기 37: 5)
작가에 있어 하느님은 인간의 사고를 온전히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와 거리가 먼 하늘에서 평화롭고 조용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심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표현하기 위해 주로 그분의 능력을 그렸다.
천지창조 전체에 나타나시는 하느님은 옥좌에 앉아 인간들을 축복하시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우주를 종횡무진으로 바쁘게 다니시는 역동적인 하느님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 뒷편 외투 속에는 이브의 미래의 모습과 앞으로 태어날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예술가를 하느님의 모습과 동일선상에 두었다.
긴 일생을 통해 인간의 능력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걸작을 남긴 작가의 초인적 열정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이런 창조 능력을 본받고 , 재현해야 한다는 작가의 크리스챤적인 책임의식과 인간적 염원의 결집으로 볼 수 있다.
아담은 아직 창조의 과정에 있었던 잠에서 덜 깨어난 몽롱한 상태인듯한 표정으로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한마디로 아직 흙에서 인간으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같은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완벽한 하느님의 모습과 판이하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자기 특유의 인간관을 표현했다
즉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고귀성과 위대함이다.
중세기에 하느님의 전능과 권위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인간은 죄인이요, 왜소한 존재로 표현되었다.
중세기에 제작된 대성당에 있는 많은 모쟈익에서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풍뎅이 같은 존재의 인간 모습이 바로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강조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왜소하고 열등한 존재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성서적인 관점 , 즉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 정확한 성서적 인간상임을 확신하면서 인간의 모습이 그전까지의 예술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위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즉 그는 인간의 약함에서 오는 죄와 허물이라는 어둠의 그림자를 지닌 존재가 인간이지만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는 아담은 하느님과 대비되는 비참한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늠름하고 우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기본이 바로 400년전 이 작품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느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향해 긴팔을 뻗어 친근감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을 향해 팔을 내밀고 계신 하느님의 모습은 인간과의 소통을 원하시는 사랑의 적극성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향해 내민 손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적극적 사랑의 표현처럼 직선적이며 힘있게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에 비해 아담의 손가락은 아래를 향해 약간 힘없이 늘어진 모습에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 들이는 태도에 있어서도 소극적이며 수동성이 되기 쉬운 인간 심성의 열악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하느님의 손과 아담의 손은 서로 닿지 않는 상태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과, 이런 하느님을 향하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면서 일치하려는 인간의 위대한 갈망을 또한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 영혼은 자기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다.
작가에 있어 인간의 현실은 시편 62편의 내용과 같다 .
“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아직 불완전한 듯한 육체를 반쯤 일으켜 세운 아담은 손을 뻗쳐 창조주로부터 막 생명을 부여받고 있는 듯한데, 하느님과 아담이 뻗친 손끝이 서로 맞닿으려 하고 있어 긴장을 고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