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
작 가 :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
크 기 : 목판에 유채 (67 X 49 cm)
소재지 :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그분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신앙 행위의 기본으로 여러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본 목격 증인이 없는 처지에서 대부분 화가의 상상력과 그 지역 정서에 맞게 표현되곤 했다.
예를 들어 오늘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신자들이 금지옥엽처럼 여겨 잘 모시는 성화를 보면 광고 업자였던 작가 워너 샐먼(Warner Sallman :1892- 1868)의 시선에 맞게 서양 백인 우월주의 근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의 예수가 부각되었다.
샐먼은 광고업자답게 예수는 현대인들에게 성공한 인간의 모델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면을 많이 강조해야 한다고 사보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개신교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은 미국을 본받고 미국식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의 정통이라 생각해서 무슨 반정부 시위를 할 때도 예수의 이름을 걸고 미국 성조기들 들고나오는 해괴한 형태는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샐먼은 예수의 모델을 백인 우월주의 사고방식에서 WASP[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두문자를 따서 줄인 말]라는 백인 중에서도 미국을 지배했던 영국인을 모델로 했다.
이 뜻은 예수는 백인이어야 하고 백인 중에서도 영국 스코틀랜드 사람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개신교 신자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미국과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들을 열광시켜 이 사진을 5억 장이나 판매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개신교 신자였던 렘브란트의 작품과 비길 수도 없이 많은 애장자를 확보하면서 참으로 신앙 표현에 있어 천박성 표현에 아직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아직도 미국 것이라면 무엇이든 설득력이 있는 이 나라 대종 개신교 신자들의 역사와 성서에 무식한 천박한 정서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종교인의 기본 정서이어야 하지만 몇만 명을 모았다는 개신교 집회에서 한 손에 태극기, 한 손에 성조기를 들고 날뛰는 열성 신자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미움과 멸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연민과 수치의 차원에서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는 데 이런 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는 비복음적인 세속적인 정서가 개신교 어떤 집단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된 이면에는 이런 무지하고 천박한 성미술의 이해가 큰 역할을 한 것이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의 초상에 대한 접근을 했다.
작가는 지금부터 500여 년 전 독일에서 문화와 경제에 있어 대단한 역량이 있는 도시에서 할동하면서 폭넓은 자기 삶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새로 시작된 개신교에 속했으나, 예술에 대해선 당시 대단한 기반이 있던 가톨릭적인 전통도 부담 없이 수용해서 그 도시에 수준에 어울리는 작품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르네상스 예술의 대단한 위치에 있던 이태리의 베네치아나 로마를 방문해서 당시 유럽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던 티치아노, 다빈치, 라파엘로의 화풍을 익혀 자기의 화풍으로 만들어 성미술 표현에 있어 빈약하던 독일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당시 이런 방대한 시도와 연구의 바탕에서 형성된 화풍으로 작품을 제작한 화가가 없던 시대에 작가는 천정부지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겹쳐 그는 자신의 예술적 기량에 자만하는 수준이 아니라 예술가는 창조의 사람이기의 세상에 예수님을 소개하는 어떤 의미의 선교사임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끼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로 갈수록 좋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얼핏 생각하면 자기의 재량에 대한 수준이 상의 자긍심의 표현이 인간적인 교만의 수준으로 변질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으나 이것은 젊은 작가의 자기 신념과 자존감의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예수님을 자기 삶의 가장 위대한 모델로 여긴 것은 예술가의 체험답게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기에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바로 예술가로서 가장 정확한 목표로 여겼기에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모습과 연관시키는 교만이 아닌 28세의 젊은 예술가의 자부심을 표현 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14세 때부터 최초로 자기 스타일의 자화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 현실에서 획기적이었다
당시 화가들은 왕이나 귀족, 혹은 고위 성직자의 초상을 그려 이것의 성공으로 자기 명성과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에 초상화 작업에 대단히 몰두 했으나 작가는 엉뚱하게 자기 자화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최초로 독자적인 스타일의 자화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전의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 자화상에서 작가는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법을 이용했다. 6세기부터 시작한 그리스도 초상화법이란 하느님의 완전성과 전능성을 강조하기 위해 완벽한 인상의 모습으로 재현한 것이다.
당연히 수염은 그리스도를 위엄스러운 존재로 상징한 것이다.
하느님이 지니신 능력의 과시를 그는 부유함의 표현으로 대변했다.
고급 모피 옷은 당시 사회에서 소수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입을 수 있었던 성공한 사람의 상징이었고 잘 다듬어진 머리 스타일과 세련된 장식은 그의 능력을 상징하면서 은연중 그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의 상징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마치 예수님처럼 표현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예술적 자질은 단순한 자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단순한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세상을 창조하는 평범치 않은 존재임을 과시한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체험한. 새로운 인문주의적 자의식이 바탕이 되었고 그것이 자화상으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당시 성공한 화가로서 수입이 매우 많았기에 여기 모델처럼 모피 같은 화려한 의상과 금은 세공사 집안의 출신답게 고급 장신구를 잘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과거 다른 예술가들이 사용하기도 했던 것처럼 자기의 재력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한 게 아니라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사용했다.
그는 이 작품의 제작하면서 왼쪽 어두운 배경에 자신의 대단한 자부심을 상징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불변의 색채로 나 자신을 이렇게 그렸다.”
작가는 이 작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보다 예수님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기에 작가는 자기 과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한다는 나비 효과를 재현할 수 있었다.
크리스천 영성의 핵심을 삶의 여러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면 과거 크리스천들이 여러 수덕적인 훈련이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표현한 것과는 다는 방법론이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산듯하면서도 새로운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 사회의 종교 현실처럼 너무 천박하고 어이없는 예수님의 초상이 넘쳐흐르면서 크리스천 종교의 진정성과 품위에 대해 손상을 주고 있는 현실에 젊은 성공한 화가가 그린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예수님을 등장시킨 것은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는 종교화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매력을 줄 수 있다.
작가는 독일 성미술의 개혁자로서 자기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이것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의식하며 살았던 예언적인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