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얼굴(1648- 1656)
작가 : 렘브란트 (Rambrant Hamensz Van Rijin : 1606- 1669)
크기 : 목판 유채 35.8X 31.2cm
소재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인간으로서 철저한 실패의 상징인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길을 가르치신 주님을 따르는 크리스챤들은 자신들의 약함으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 과정에서 큰 길잡이가 된 것은 두말없이 성서였다
신구약 성서중에서도 특히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을 너무도 소상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면서 문득 그들이 믿는 예수님의 실재 모습이 어떤지를 알고 싶은 호기심과 그리움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깊어졌다
마치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 선조의 모습이나 부모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을 보고픈 갈망의 표현이 신앙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비쟌틴 예술에서 모쟈익이나 이콘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신학에서 예수님의 위상은 “천지의 창조주” “ 세상의 심판주”였기에 그분의 신성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분의 인성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즉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천상 옥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시는 구세주 예수 였다.
그후 그리스도의 인성이 서서이 강조되면서 인간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졌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에 의한 것이 전부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라면 극도의 고통스런 순간의 인간 모습처럼 작가의 상상력 표현이 전부였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과거 교회 성화들이 우상숭배의 차원에서 박대를 받으면서 새로운 종교 미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과감한 발상이 시도되었다.
작가는 개신교가 영향을 끼치던 시대 화란에서 활동한 작가였다
그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진취성이 강한 화란인의 기질 탓에 비록 다른 나라에선 대단한 광기를 띄던 칼빈 주의자들 마저 여기서는 광기를 자제하던 처지였기에 그 역시 작품 활동에 있어서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다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선 먼저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전까지 작품에서 그의 필수처럼 여기던 후광을 다 제거했다.
작가는 그 시대에 성화의 큰 주문자인 교회나 부유한 상인들의 기호에 맞는 전통적인 예수님의 모습에서 탈피해서 예수님의 실재 모습을 그리고자 하는 파격적 시도를 했다
작가는 당시 암스텔담에 살고 있던 젊은 유대인 남자들을 모델 삼아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다.
이렇게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가 8개 정도 남아있으며
이것은 과거와 달리 철저히 지상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알고픈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중세 내내 표현해왔던 지엄하신 구세주의 예수의 모습 대신 ' 죄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삶을 사셨던 지상 삶을 사신 인간 ' 예수님을 그렸다.
제목 :예수님의 얼굴 (1648- 1650)
크기 :목판 유채 25 X 21.5cm
소재지 독일 베를린 고전 미술관
그의 예수님상은 르네상스 작가들이 시도했던 희랍신과 같은 수려한 용모에다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는 그런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작가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배회하며 민초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먼저 얼굴 전체의 표정은 삶의 고뇌로 충만한 모습이다.
근심과 걱정 연민의 정이 가득찬 얼굴을 보이고 있다
하느님으로서의 권능이나 영광과는 거리가 먼 그런 모습이다.
먼지 투성이의 갈릴리아 지역을 오가면 복음을 전하던 순회 설교사의 초라하고 피곤한 모습이다.
전체 화면이 어두운 분위기에서도 무었인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표정이다.
그의 모습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영광스러운 신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으나 진리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지성적인 기품을 잃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이런 표정은 작가의 삶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지상 삶을 사셨던 인간 예수님의 정확한 모습을 그리고픈 열망에 작가의 고달픈 삶의 여정도 자연스럽게 도입되게 되었다
작품 활동 초기 작가는 대단한 호응을 받으면서 명망을 유지했고 당시 화란 사회의 한다한 명사들의 초상화를 그림으로 대단한 평판과 인정을 받게 되었다.
오늘도 남아 있는 그가 제작한 초상화들을 보면 그가 국제무역으로 대단한 부를 누리고 있던 화란 사회에서 얼마나 인정받던 작가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예수의 모습을 그리면서 당시 미술품의 큰 수요자였던 교회와 지도층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작가의 삶에는 어려움이 겹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작가는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4명의 자식 중 셋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 양육을 위해 고용한 유모와의 치정 관계에 휘말리게 되고, 재산 문제까지 겹치면서 파산선고를 겪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자신의 이런 약함 때문에 그리 편치 않은 인생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실패와 소외의 삶을 살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작가는 삶의 여정에서 자기 삶의 무거움을 깊히 감지했으며 그 고통을 깊히 느끼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과 같은 그의 이런 인생 체험은 작품에서 어둠으로 드러나고 있다.
삶의 고난과 비참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머리 , 복장, 배경의 주조를 이루는 어둠의 분위기에 유독 얼굴 부분에 빛이 드러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자신의 표현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 12)
작가는 바로 이 빛을 예수님의 얼굴에 던지면서 빛을 따르라고 가르치기 이전 자기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제자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기회만 있으면 그를 해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무리 가운데서도 어둠에 빠지지 않고 빛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보이고 있다.
하우젠슈타인(Hausenstein)은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빛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예언자의 빛이라고 했다.
마치 사울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여정에서 바울로로 변모되던 과정에서 보았던 그 빛이다“라는 것은 너무도 작가의 심중을 잘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이 빛은 자연 광선이 아니라 영적인 빛이다.
이 빛은 또한 당시 작가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가지 시련으로 사면초가의 어려움속에 빠져 있는 작가의 삶에서 신앙이 주는 위안과 희망이라는 빛이 없다면 작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자기판단이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예수님의 고통을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았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예수님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 여겼다면 그는 철면피한 인간일 것이다.
그는 자신 탓으로 받게 된 고통을 예수님과 일치 시키면서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구분없이 비추는 하느님의 가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크리스챤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전체가 어둠으로 충만한 화면에서 드러나는 예수님 얼굴위에 빛은 죄인인 인간 삶의 여정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 죄와 허물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끊임없이 빛을 던지시는 희망의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가 그린 몇 편의 예수님 얼굴에는 작가의 신앙이 묻어 있다.
작가는 르네상스의 작가들처럼 많은 책이나 지식을 통해 세상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오직 성경만 읽었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모범적으로 표현한 작가라 볼 수 있다.
가난과 실패속에서 고독하게 죽은 이 작가가 남긴 몇 가지 유품중에 성경 한권이 있었다.
작가는 이 세상 삶을 사셨던 우리와 같은 모습의 인간 예수를 정확히 그리기 위해 유대인을 모델로 사용할 만큼 그전 시대 작가들과 다른 파격적인 시도를 했으나 결국 그가 남긴 것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다.
작가의 후대를 살았던 빈센트 반 코흐는 작가의 이런 작풍을 더 없이 평가하면서 화가로서의 삶에 스승으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그는 예수님을 바로 그린 유일한 화가였다."
워너 살먼 (1940년)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예수의 모습을 자기 취향대로 선택하고픈 갈망도 있다
성서에 나타난 고난과 실패의 진한 그림자를 던지는 예수를 보는 것은 그리 마음 편치 않는 일이기에 ,편안하고 상쾌함을 줄 수 있는 예수의 모습을 갈망하고 있다,
마치 스타벅스 커피집에서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 즐기기에 부담이 없은 그런 예수의 모습이다.
근대에 이 갈망을 극적인 성공으로 이끈 위인이 있다.
워너 살먼(Warner Sallman: 1892- 1968)이라는 미국의 광고 업자였다.
그는 광고업자답게 미국인의 취향에 맞는 예수를 그렸는데, 이것은 성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강한 개신교들에게 파격적인 인기를 얻어 거의 5억장이 복사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도 예수님의 초상으로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만큼 그의 작품은 개신교의 심볼 마크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델은 영락없는 푸른 눈에 흰 피부 , 곱게 다듬은 머리를 한 앵글로 섹션 꽃미남의 얼굴이며 미국인에게 선망의 대상인 전형적인 영국 남자의 모델이다.
미국인이 아닌 크리스챤들에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의 상징인 미국이 바로 예수 믿어 성공한 이상국가의 모델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성서에 나타난 예수, 용모에 대해선 그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표현된 이샤야 53장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과 거리가 먼 꽃미남, 오늘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있는 인기 연예인처럼 산듯한 모습의 예수 는 이제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강조하는 교회에서 까지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이 그림은 “종교 상품” 수준의 예수에 불과하며 이 작품이 크리스챤이라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오늘 일부 크리스챤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내가 믿고 싶은 예수”와 “믿어야 할 예수”의 모습 사이에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렘브란트의 예수상은 우리가 깨트려야 할 예수상을 너무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래를 보기 힘든 폭발적인 교세성장의 현실에서 성공신화를 창출하는 대형 교회의 위상을 통해 한국 교회의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믿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모습의 왜곡이 너무 심해 교회가 개혁되지 않으면 더 이상 예수의 교회가 아닌 회칠한 무덤이 되고 만다는 탄식이 의식있는 크리스챤들에게 공감대의 폭을 넓히고 있는 현실에서 렘프란트의 이 작품은 오늘 이땅에 크리스챤들이 지워야 할 허구적인 예수 우상에서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정확히 제시하는 한편의 시각적인 강론이요 설교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