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상승 Emergence (2002)
작가 : 빌 비올라 Bill Viola (1951- )
규격 : 비디오 아트: 시간 11분 49초
소재지 : 미국 로스엔젤스 폴 게티(Paul Getty) 미술관
아름다움의 표현은 시대와 문화의 경향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은 성미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예술가들은 신학자 보다 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신학이 표현하지 못하는 신앙의 내용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학은 신조화 되면서 시대의 정감을 수용할 수 있는 신축성을 상실한 채 경직되어 종교의 기본인 생기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기면, 예술은 신학이 표현하지 못하는 하느님을 과감히 표현하고 더 시대 문화에 적합한 표현을 할 수 있는데, 현대에 있어 비디오 아트는 바로 이 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새로운 예술 유형인 비디오 아트의 가장 큰 특징은 회화, 음악, 조각도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며, TV브라운관을 통해서 움직이는 이미지 즉, 움직임을 따라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며 그 공간은 무한한 시간적 흐름을 가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분야의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백남준 선생이시다.
그의 파격적인 시도는 이 분야인 경계를 허물고, 인간 의식의 진보적 형성 및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매체의 모든 영역을 오브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시켰다.
그는 새로운 매체들을 예술적 재료로 사용하여 시간적 연장 속에서 전개되는 시각적 표현의 세계를 구현하고 대중매체로서의 TV와 비디오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 미술의 확장된 한 분야로서 인정받게 만들었다
작가는 미국 출신으로 백남준 선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제자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전수한 이 분야를 기술적인 계발 이전 영성적인 접근을 시도했으며 이 활동을 통해 종교 예술의 분야를 현대 기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대단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가는 피렌체에서 일 년을 지내면서 중세 르네상스 도시가 남긴 문화적인 유산에 큰 감동을 받게 되면서 500년 이상의 과거를 그의 작품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고 싶은 갈망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초기 르네상스 작가였던 마솔리노 다 피나칼레 (Masolino da Pinacale: 1483- 1447)의 다음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것을 새로운 기법으로 재현했다
작가는 르네상스 작가의 작품을 재생산하거나 복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나 이 작품에 감동받은 작가는 현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법으로 이 작품을 재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작가 : 마솔리노 다 피나칼레(1483 - 1447)
크기 : 목판 유채 280X 118cm
소재지 : 이태리 엠폴리(Empo;i) 미술관
그는 성서적 바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을 전혀 새롭게 모든 문화와 종교가 수긍할 수 있는 폭넓은 차원에서 재작했다.
한마디로 크리스챤 신앙이라는 종교적 차원을 더 폭넓은 영성적 차원으로 전개했다.
종교의 역사는 5000년이지만 영성의 역사는 50,000년이 되기에 영성을 종교 안에 축소시키기보다 종교를 영성적 차원으로 확장시킬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법인데, 작가는 바로 이런 시도로 종교 예술의 폭을 파격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영성적인 표현에 강한 갈망을 느껴 일본에 와서 선불교에 심취하는 기회를 차지하면서 동양 종교 안에 정착된 높은 영성적 전통을 발견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크리스챤 전통에서 구축된 예술을 통해 표현된 믿음을 바탕으로 깔고 불교의 선, 모슬렘 신비주의인 수피즘 과 크리스챤 신비주의를 통합해서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인 부활을 여러 종교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주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은 모든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으며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다 첫 목격증인을 여자들로 등장시키고 있다
루카 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루카 24: 1-2)
작가는 이 여자들의 등장 장면을 무덤이 아닌 정원에 있는 우물로 설정했다.
두 여인은 침묵 속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우물을 응시하고 있다.
성모님을 연상시키는 오른쪽의 여인은 긴 검은 옷으로 죽음을 연상시키고 , 왼쪽의 젊은 여인이 생기 있는 색깔을 옷을 입고 팔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생명을 상징하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무리 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침묵 속에서 우물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그들 안에 있는 사랑과 슬픔의 공감대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부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로 물과 연관시킴으로서 세례 성사로 다시 태어나는 크리스챤의 세례 신학과 부활을 연관 시키고자 했다
또한 물은 자체로 생명의 상징이 되기에 작가는 크리스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이란 부활의 메세지의 전달 통로로 물을 선택했다.
젊은 여인이 무덤을 들여다보듯 우물을 응시하는 사이에 우물 안으로부터 그들이 따르던 주님의 머리가 솟아오르면서 물이 우물 바닥을 적시는 것을 보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순환하는 생명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여기서 남자의 머리가 떠오르는 것은 새 생명의 상징이다.
이것은 또한 성서의 다음 구절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서 6:3-6)
작가는 우물에서 솟아오르는 남자의 머리를 통해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라는 참 생명의 전주곡임을 감동적으로 암시시키고 있다.
우물로부터 물이 쏟아져 흐르면서 남자의 윤곽이 뚜렷이 떠오르는 모습을 여인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이 부분을 아주 느리게 전개시킴으로서 관객들이 마치 중세 작가의 프레스코를 보듯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을 연상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상상으로 빨려들게 만들고 있다.
물이 쏫아져 흐르고 있는 우물을 주시하면서 늙은 여인은 그 속에 서 떠오르고 있는 젊은이를 발견하다.
성모님을 연상시키는 검은 옷의 여인이 솟아오른 남자의 등 부분을 끌어안고 있는 앞으로, 젊은 여인이 수의로 사용되었던 흰 천으로 예수님의 젖은 몸을 닦아드리고 있다.
이 두 여인은 처절한 죽음을 겪으신 주님을 더 없이 따뜻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 장면에서 작가는 물에서 올라온 남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삶의 정화, 탄생, 영적인 재탄생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작가는 성서적 바탕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 장면을 통해 인간 삶의 기본적인 갈망이 죄의 흔적을 지우고 정화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고픈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여자는 일어나서 우물에서 올라오는 젊은이를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애인을 만났던 것처럼 다정히 포옹한다. 물 밖으로 완전히 나온 창백한 모습의 젊은이는 바닥에 쓰러진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젊은이의 머리를 자기 무릎에 뉘인 늙은 여인은 옆의 젊은 여인처럼 눈물을 흘리며 벅찬 감동으로 그의 몸을 껴안는다.
남자의 젖은 몸을 닦은 여인들은 남자를 우물 앞에 누이고 천으로 벗은 몸을 가려주고 있다
늙은 여인이 젊은 여인의 도움으로 물에서 올라온 그 젊은이를 부촉하며 바닥에 누이게 된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젊은이의 몸을 천으로 덮어준다.
이 장면이 주는 의미성은 분명치 않고 애매하다.
예를 들어 물에서 올라오면서 물이 밖으로 쏟아져 흐르는 것은 탄생을 의미하고 바닥에 누인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여인들은 끔직한 십자가의 고통을 겪이시고 죽으심으로 고통에서 해방된 주님을 자기들이 모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슬픔 가운데서도 위안을 느끼는 심정으로 주님을 응시하고 있다.
이제 그들이 사랑하던 주님께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사랑 가득 찬 모습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있다
이들의 표정은 모든 인간적인 따스한 사랑과 경건함을 담은 가장 인간적이고 신적인 사건의 의미성을 확인하는 숭고한 모습이다.
이 작품의 전체 길이는 11분 45초이기에 중세기의 프레스코를 움직이는 모습으로 감상하는 정감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대성당의 세례반을 상징하는 우물로부터 사람이 솟아오르면서 물이 주위로 쏟아져 나와 흐르는 모습에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상징성을 더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주님의 부활이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을 재생이라는 인류 공통의 희원으로 확대 표현함으로서 부활신앙이 크리스챤들의 신조만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 인간적인 삶, 영원한 삶에의 갈망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근감의 기회를 제공했다.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신조와 교리를 만들게 되고 한번 만들어진 신조는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기에 턱 부족한 시대착오적인 이론으로 정착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표현하기보다 부활의 박제품이 되는 안타까움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처지에서 현대 예술은 어떤 때 현대인의 감성에 부응할 수 있는 신앙의 내용을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Study for emergence, 2002, Bill Viola>
빌 비올라의 작품을 2분 51초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주소를 아래 남깁니다.
클릭하시고 감상하시면 됩니다. ↓
http://www.youtube.com/watch?v=FagLc3rOV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