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금화가 있는 바니타스(Coin Vanity)
작가 : 17세기 스페인 학파
크기 : 캔버스 유채 45x59.5cm
소재지 : 프랑스 루앙(Rouen) 미술관
스페인 역사에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를 황금세기라 부른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많은 은이 스페인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경제 정치는 호황기를 누리게 되었다. 1493년과 1800년 사이 세계 은의 85%와 금의 70%는 아메리카에서 생산되었으며 이것이 스페인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경제적 호황 상태에선 겉으로는 풍성하지만 머리가 텅 빈 사람들이 설치게 마련이고 특히 교회는 이런 부의 축적이 이룬 것이 교회로 투입되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은 많이 늘었으나 신자들의 실제 신앙생활은 텅 빈 형식의 준수에 그치는 일이 많았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다. 물질적인 풍요는 하느님의 뜻이 아님은 물론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마약과 같기에 교회는 신자들의 건강한 영성생활을 위해 이것을 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서 이런 요구에 부응한 것이 바로 바니타스(Vanity)라는 화풍의 작품이었다
이것은 죽음의 불가피성, 속세의 업적이나 쾌락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주로 다루었으며 가톨릭 신앙이 지배하는 스페인과 개신교 지역인 네덜란드 지역에서 대유행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개신교 신자들은 당시 그들 교회가 강조하던 성화 상을 우상숭배로 치부하는데 익숙해서 가톨릭 수준에서의 성화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성화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양식의 그림은 그들에게 거의 유일할 만큼 적극적 호응을 받아 양과 질에 있어 대단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앞에 언급한 이유대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로 굴러 들어온 은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교회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위험성을 언급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말씀의 실천과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기억을 일깨우게 되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 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25)
작가는 성서 말씀에 대한 경각심과 자기 당대 스페인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생각 없이 즐김으로서 인생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사람들이 그토록 몰두하는 돈을 대비시킴으로서 단순하면서도 강한 교훈을 주고 있다. 바닥엔 하나 만으로도 귀하게 여기는 금화와 은화가 널브러져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된 것이 더 바랄 것 없는 지상 행복의 충족됨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금화와 은화를 넣어두었던 금고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금화와 은화는 그 일부에 불과하며 금고를 열면 상상을 할 수 없는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유혹을 하고 있다.
헌데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돈이 널브러진 위에 이것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나 건강한 젊은이가 아닌 엉뚱한 해골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인간으로서 모든 것이 다 끝난 죽음의 상징인 해골은 입에 금화를 물고 있다. 참으로 아무런 쓸데가 없는 것이 너무도 허망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있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몽매간에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삶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해골은 금화를 물고 관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구약의 시편에서도 여기에 대한 좋은 교훈이 있으나 우매한 인간들은 이런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다가 금화를 물고 있는 해골 꼴이 되어도 아무런 개선을 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불구자가 되고 있다.
“너희는 제후들을 믿지 마라,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을. 그 얼이 나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그의 모든 계획도 사라진다.”(시편 146,3-4)
이처럼 성서는 하느님이 있어야 할 최고의 자리를 물질로 채우고 만족하는 인간의 허망한 미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성서의 이 내용을 너무도 시각적으로 강렬히 알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16-21)
작가는 너무 솔직하고 강하게 물질적 풍요의 위험과 허망함을 제시하면서 신앙의 가치로 돌아와 하느님이 우리 삶의 가장 기본으로 두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변함이 없는 진리이며 오늘날 오히려 물질의 가치와 비중을 과거에 비길 수 없이 커져서 가정과 부부와 같은 인간의 기본 가치가 깨어지고 있는 현실이 되고 있기에 우리의 현실에서도 너무나 경각심을 줄 수 있는 좋은 내용이다.
이 작품은 우리 삶의 방향성을 잘못 인도할 수 물질의 위험을 강조하면서 인생의 행복은 하느님과 직결되는 것임을 간접적인 강조로 크리스챤의 마음을 하느님을 향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단순히 조심해야 할 것의 일방적인 강조로 끝나지 않고 이것을 통해 삶을 건전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 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코헬렛 12,13)
시편의 시작인 1편은 인간의 행복을 주제로 다음과 같이 인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일세.” (시편 1,1-6)
현대에 있어 재물이 주고 있는 위험은 작가가 이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현대 우리나라는 과거 어느 시대 보다 더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으나 삶의 질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고 있다. 인간의 기본인 결혼에 있어서 경제적 차원을 지나친 비중을 둠으로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기보다 풍요 그 자체를 누리며 사는 것을 아무 부담 없이 선택함으로서 사회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다.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현실의 표현인 유토피아 보다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부분이 극단적으로 확대되어 초래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모습 즉 디스토피아(Dystopia))의 어두운 모습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오는 현실에서 작가가 제시한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벗어나야 할 물질에 대한 맹신과 교회가 가르치는 물질에 대한 건강한 가르침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움 모습으로 변할 수 있으며 이 작품은 이런 현대인의 방향전환에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