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성탄 (1998)
작가 :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 1923년 ~ 2017년)
크기 : 캠퍼스 유채 60 X 45cm
소재지 : 프란치스코회 정동 수도원
성탄은 이제 크리스챤의 축제이기 이전 이제는 인류의 축제가 되었다.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성탄 시기에 가족들이 모여 가정과 가족들의 소중함을 느끼는 인간 축제의 중요 모습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성탄은 인간적인 모든 소중한 것과 아름다운것의 가치를 일깨우는 축제이며 그러기에 성탄의 모습은 어떤 차원에서도 인간적인 훈훈함과 아름다움의 정감을 주고 있다.
종교가 사람들을 갈라치우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처지에서도 인간적인 것에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좀 특별한 사연이 있는 작품으로 본인이 몸담고 있는 정동 수도원에 소장된 작품이다.
작가가 정동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자신의 인간적인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기에 무슨 거창한 사연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신앙의 내용을 마음으로부터 담고 있는 좀 특별한 작품이다.
작가는 오늘 러시아와 생사를 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유수한 대학으로 꼽히는 마사주세트 공대(MIT)에서 미술과 설계를 전공한 후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건축과 여러 야심작을 많이 남긴 중국 출신의 작가 이오잉 페이(Ieoh Ming Pei(I.M. Pei) 건축회사에서 일했던 재원이었다.
그녀는 미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스페인 유학을 계획하던 중 그에게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李玖)가 나타났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 여인과 결혼한 영친왕의 처지는 해방이 되면서 국적 조차 상실한 처지가 되자 이구는 미국 MIT 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했고 왕족으로 불리긴 너무 초라한 자동차도 하나 없는 빈곤한 학생이었다.
이구는 직장에서 7살 연상인 쥴리아 여사를 만나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던 쥴리아는 뉴욕 성당에서 혼인미사로 결혼을 치루었다. 그 후 이승만 정부는 귀국을 원하는 영친왕 가족을 혹시나 왕정이 복귀될까봐 두려워해서 귀국을 탐탁잖게 여겼으나 박정희 장군의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귀국해서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구는 서울에 오자 전주 이씨 종친회의 일부가 그를 왕으로 추대할려는 움직임에 솔깃해서 외국인인 쥴리아는 자기의 장래 운명에 적합지 않다는 생각으로 멀리하기 시작했으나 쥴리아는 시어머니인 이방자 여사가 하는 사회사업 시설에 필요한 공예품을 제작하면서 생활했다.
항상 남녀간의 사랑엔 변화가 많은 법이었으나 특히 이구와 쥴리아의 만남에선 사랑보다 세상 이익을 더 염두에 둔 이구의 처신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세손이란 이구의 귀족적 품위에 먹칠을 하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쥴리아 여사는 일체 내색을 내지 않고 시어머니인 이방자 여사의 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작가는 이구와 결혼 후 몸담게 된 이 왕가에 오묘한 인연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시아버지인 영친왕은 일본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인도로 요셉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방자 여사도 명휘원이라는 사회 사업장을 운영하다가 죽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으로부터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음으로 온 가족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쥴리아와의 결혼에 흥미가 없는 이구에 의해 결혼 24년만에 일방적인 이혼을 당한후 쥴리아는 어떤 보상이나 위자료를 요구함이 없이 그가 해군에 근무했던 댓가로 받는 연금과 자기 노동으로 힘든 생활을 꾸렸다.
왕족과의 결혼에서 헤어진다면 그에 합당한 물질적인 보상을 청할 만도 한데 그는 일체 그런 것이 없이 오히려 이구와 시귈 때 받았던 선물 중에 보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450점을 덕수궁 미술관에 기증할 만큼 품위있는 삶을 살았다.
2005년 4월, 자신의 삶을 소재로 제작되는 영화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공교롭게도 그의 남편이었던 황세손 이구 사망 소식을 들었으나 종친회로부터 장례식에 정식으로 초청은 받지 못하고 종로 거리에서 노제를 지내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며 남편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후 몇 년 서울에 머물면서 정동 수도원 옆에 있는 정동 아파트에 지내게 되었다. 이 아파트는 서민 아파트로 지어진 것이라 엘리베이터도 없어 휄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그에게 이웃인 프란치스코 수도원 수사들이 누님 모시듯 돌보왔다. 매일 미사에 나오는 그분을 도와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에서 수도원 성당까지 아기를 모시듯 돌보면서 신앙 안에 형제 자매라는 인연을 굳혔다.
원채 신앙심이 깊던 쥴리아 여사는 하와이로 떠나기 전 정동 수도원에 감사의 표현으로 이 작품을 남겼는데 너무도 평범한 주제의 성탄화였다.
헌데 특별한 것은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를 프란치스코 수사로 표현한 것이다. 아기 예수와 프란치스코 수사는 아무리 일체성을 찾아도 좀 생경스러운 것이나 신앙심 깊은 쥴리아에겐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를 도와 주는 프란치스코 수사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상황을 신앙의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신앙의 교훈으로 닥아올 수 있는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쥴리아 여사가 보은의 마음으로 남긴 이 작품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다가올 수 없고 좀 어색한 면도 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이것을 무슨 대단한 선행인양 칭찬 받는 것이 좀 어색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쥴리아 여사 편에서 보면 아름다운 그분의 영혼에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프란치스코 수도자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말구유 아기와 프란치스코회 수사는 정서적으로 좀 맞지 않는 면이 있지만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인간적으로 친근한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그분으로서는 너무도 고맙고도 미안한 존재로 자기를 도운 정동 수도원 수도자들과 연결 시킨 것은 오히려 그분 신앙이 입에 발린 신앙이 아니라 참으로 깊이 있고 현실적인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쥴리아 여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하와이에서 지내다 그곳에서 선종했기에 서울에서는 한달이 더 지난 후에야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삶을 산 쥴리아에게 친구가 많을 수 없으나 그의 인품에 매혹된 몇 분의 자매님들이 추도식을 정동에서 하기로 했다.
그분의 삶처럼 아름다운 미사로 그분을 보내기로 준비했는데 첼리스트인 이 베드로도 기꺼이 참석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고귀한 삶을 사신 그 영혼을 하느님 품으로 올렸다.
이 작품은 한 인간으로서 크리스챤으로서 너무도 고귀한 삶을 산 기념으로 수도원에 남아 있다.
가톨릭 교회 성탄 신심의 기본인 말구유 경배가 만들어 진 모습에 의해 감동을 줄 수는 있으나 이것이 성탄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 소년 소녀 취항이 될 수 있는데 작가는 자신의 열악하고 괴로운 삶속에서 신학이나 다른 인문학적인 지식이 아닌 프란치스칸 수사들과 만든 인간 체험으로 영글어진 것 안에서 성탄의 진면모를 표현한 것은 참으로 허황하거나 감상적이 아닌 현실 체험안에서의 성탄 체험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