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클레멘스 대성당 모쟈익 (12세기)
소재지: 로마 클레멘스 대성당
로마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묻은 도시이다. 로마가 현대화되고 정치체제도 교황이 군주로 있던 과거가 아니기에 로마는 갈수록 이 세상의 도시와 다름없는 그런 모습으로 변모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아직 구석구석 신앙이 묻어있으며 여기 소개하는 성당도 내용의 탁월성으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 로마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는 규모로 승부를 지울 수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울로 대성당,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성모 설지전 대성당 등 4개였으나, 초대교회에서는 달랐다.
초대 교회의 역사가 묻은 성당은 로마 제국의 신전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전으로 바뀐 판테온(Phanteon)과,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성 베드로의 사슬 성당 ,성모 설지전 대성당,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클레멘트 대 성당이었다.
로마제국의 긴 박해를 이기고 종교자유를 얻었을 때, 콘스탄틴 황제의 비호에 의해 지하에서 머물던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많은 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이 지어졌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성당이며, 그 후 여러 번 중수(重修)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지하엔 초 세기에 건축 된 성당의 유적이 남아있다.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성당이 더 확장되고 12세기부터 이 성당엔 여기 소개하는 걸작 수준의 모쟈익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모쟈익은 제단 부부 후진에 있는 것으로 아름다움으로 뿐 만아니라 성숙된 신학의 변천사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그전까지 비쟌틴 예술에서 자주 표현된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 그리스도”로서 막강한 권능을 지닌 전능하신 하느님으로서의 강력한 신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 시대 문화의 영향이었다.
긴 박해를 끝내고 종교의 자유를 얻은 교회는 박해받던 처지에서 기득권자가 되었으며, 교계가 로마 제국의 모양새를 따라 제도화의 모습을 취하게 되었고,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은 정치 지도자와 어울리는 권력자적인 사고방식과 모양새를 닮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움직임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바탕으로 신성이 강조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더 없이 실패의 모습의 그리스도보다 천지의 창조주로서의 막강한 군주적 하느님이 교회의 영향력을 과시하는데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명백히 언급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관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은 극소수인 설명에 불과했고, 영광스러운 부활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조되면서 십자가는 표현되더라도 영광스럽고 힘 있는 모습의 그리스도의 뒷면을 장식하는 장식 정도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권능자로서의 위엄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표현은 중세기 시토 수도회원으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성 베르나르도 (St. Bernard Chiaravalle: 1090- 1153)으로부터 시작되어 교회 역사에서 “제 2의 그리스도”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에 와서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성 베르나르도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시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제단의 중심에 나타나게 된 것은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들이 갈릴래아의 어부 예수의 모습 보다 황제나 군주들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사치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는데 대한 뜻 있는 크리스챤들의 실망과 염려의 반영이었다.
교회의 이런 모습에 실망한 신자들의 신앙 표현이 복음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눈뜨게 되면서 이런 대중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 이 바로 이 작품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어항의 물도 조금씩 바꾸어야지 갑자기 바꾸면 물고기가 죽는 것처럼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도 신중한 배려를 했다.
그전까지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막강한 군주 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줄 수 있는 충격과 실망을 줄이기 위해 맨 윗부분에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왼손에는 복음을 드시고 오른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다만 전통적으로 중앙에 모시던 모습을 윗쪽에 배치함으로서 신앙의 내용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사려 깊은 배려가 되었다.
그 아래 오늘까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희랍어와 “그리스도는 시작과 마침“이라는 결합문자를 표시해서 발전된 그리스도론을 전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지만, 더 이상 죽음이 없는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 아래 반원형의 형태로 파도치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하늘이 열렸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아래 어떤 사람의 손이 둥근 화환을 강하게 붙들고 있는데 이것은 승리의 상징이다. 작가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인간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전 단계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막강한 신성을 강조하던 전통적인 표현을 중앙이 아닌 윗부분에 함으로서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죄 외에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있다.
이 십자가의 위치는 과거에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이 차지하셨던 중앙 부분을 차지하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강조점이 신성에서 인성으로 옮겨졌음을 알리고 있다.
당시의 시각으로는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거부감이나 당혹감을 주지 않도록 사려 깊게 배려된 모습이다. 이 십자가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고통의 십자가로 보이기보다 어떤 장식품으로 보일 만큼 화려하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고통 받는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임을 강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옥좌에 앉으신 천지의 창조주처럼 여유 있고 품위로운 모습이며 다음 성서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쫒겨 날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 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 31- 32)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 네 곳이 못 박혀 있으나 발 아래 받침까지 있어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선 안정된 모습이다.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 성모님과 사도 요한 역시 고통이나 슬픔의 흔적이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경배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과 사도 요한의 시선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관중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여기에서 작가의 심원한 의도가 있다. 당시로서는 생소하게 여겨졌던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을 관중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 선포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성모님의 손은 경배의 자세를 보이고, 사도 요한은 오른 손을 들어 군중들에게 십자기에 달리신 우리 구세주 예수를 바라보라고 초대하고 있다.
십자가 안에 열두 마리의 희고 아름다운 비둘기가 있는데, 이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로 불림 받은 제자들의 상징이거나, 아니면 주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 외 작품 전체에 성서에 나오는 상징들, 즉 어린양 포도나무가 빼꼭히 드러남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크리스챤 신앙의 힘차고 밝은 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면은 그 시대에 필요한 신앙의 중심인 십자가를 너무도 무리 없이 부드럽게 잘 표현함으로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새로운 부분을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앙의 내용은 불변이지만 신앙의 표현은 시대 문화에 따라 적절히 새롭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부각시킨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