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808년 5월 3일( 1814)
작가 프란체스코 고야 (Francesco Goya: 1746-1828)
크기 : 캠퍼스 유채 : 266X 345cm
소재지: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Prado) 미술관
스페인 아라공 지방의 벽촌에서 도금사의 아들로 태어나 바로크 미술 전문가의 제자로 기술을 익힌 그는 18세에 이미 직업 화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는 예술적인 재능과 열정 못지않게 인간적인 야망 또한 대단했기에 당시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궁정화가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궁정화가의 여동생과 결혼하면서 착착 자기의 야망에 도전했다.
이런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1789년 몽매간에 그리던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새로 국왕이 된 카롤로 4세와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그의 찬란한 인생을 시작했다.
화가로서 성공하고픈 불굴의 노력과 행운은 항상 그를 성공한 인간의 모델로 만들었으며, 이런 사람들에게 따르기 마련인 여복도 대단해서 실재 자녀는 6명뿐이었으나 20여명으로 소문날 만큼 그는 “걸어다니는 페니스”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으나 아무튼 명예와 성공이라는 두 토끼를 잡은 선망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간적으로 보잘 것 없는 처지에서 왕실화가라는 대단한 성공을 이룬 후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질병과 종교 재판이라는 무서운 자유의 제한 속에서도 그는 인생 전반에 걸친 폭넓은 주제의 작품을 남기고 당시로서는 좀 예외적인 81세의 인생을 마무리 했다.
그가 30대로 접어들면서 기득권자인 왕실의 기호에 맞는 작품 제작이 성공으로 직결되는 것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기득권자의 권익을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궁정의 태도가 아닌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군주제를 정확히 비판하는 단체에 가입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된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스페인 국민들이 받아야 했던 충격의 현장을 담은 것으로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된 사회적 혼란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크리스챤들이 대종인 두 나라 사이에 생긴 어리석음, 잔인함, 억압, 무자비함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으며, 이 작품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야 이후의 화가들은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자기 시대의 사회적 이슈를 좀 더 자유롭고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1808년 5월 3일은 그 전날과 전혀 다른 충격적인 날이었다. 그 전날 마드리드시민들은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의 앞잡이로 시민들을 괴롭히는 북아프리카 용병들을 살해했다.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마드리드에 진주한 프랑스군은 스페인 애국자들을 즉석에서 처벌하기 시작했고, 이 장면은 새벽 4시경 재판도 없이 실시한 잔인한 학살 장면을 담고 있다.
일군의 혁명군들이 교회와 궁전이 배경에 보이는 어떤 외딴 곳에서 학살당하고 있다. 칠흑처럼 어둔 밤에 살인을 위해 비치고 있는 것은 달빛이 아닌 살인을 돕기 위해 켜진 등잔 불빛이다. 인간이 만드는 악행의 참상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빛이다.
살인자들의 총검 앞에 이미 죽은 사람들,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비장하다. 놀람, 경악, 공포의 얼굴이 이들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알지 못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의 순진한 큰 눈망울과 죽음을 앞둔 두려운 시선이 관람자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사나이는 폭력 앞에 총알받이로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지금 무지한 폭력의 총칼에 죽어가는 처지이지만 자신이 외치는 정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흰색의 셔츠와 불빛 속에서 노란 빛깔의 바지는 전체를 감싸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에서 밝은 색깔로 그의 죽음이 패배나 실패가 아닌 새로운 승리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투쟁은 자기의 이익을 얻거나 지키기 위한 동물적인 투쟁이 아닌 의로움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기에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폭도들이 겨냥한 총은 곧 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나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으로 압제자인 프랑스의 패배와 고통당하는 스페인의 승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적으로 더 없이 처참한 가운데서도 죽어가는 생명을 비추는 불빛 속에서 찬란한 희망의 빛이 드러나고 있다. 공교롭게 그가 벌린 오른쪽 손은 십자가에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손처럼 목자국의 흔적이 있다.
작가는 잔인한 압제자들에 대한 떳떳한 저항이야말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임을 암시하고 있다. 신앙 고백은 성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비참하고 부조리한 삶의 현장과 깊이 연결되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이미 총을 맞아 목숨이 끊어진 나둥그러져 있는 두 사람 옆에 세 명의 투사들이 곧 다가올 죽음 앞에선 인간의 비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봉기가 실패로 끝났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큰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비굴하게 용서를 청하거나 항복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불끈 쥔 주먹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은 수도자가 있다. 그의 복장으로 보아 프란치스칸 수도자이며 민중들과 삶의 애환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민초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여기는 수도자이다.
그는 결코 시각적으로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의 인간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 특히 어려움의 순간에 동참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기에 이 절망 속에 빠진 사람들 곁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 수도자는 곧 총살을 당할 혁명군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받아야 할 총살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여기며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손은 다른 혁명군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기회만 되면 상대방을 타도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삶의 최고로 여기는 프란치스칸 수도자이기에 이 절망의 순간에 할 수 있는 그의 처신은 혁명군들과의 동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라 여기며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수도자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체념의 자세가 아니라 왜 세상에 불의한 사람들이 성공하며 이들의 악행에 의해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지를 알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다.
“하느님께 아뢰오니 내 바위시여, 어찌하여 이 몸을 잊으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눌려, 서럽게 지내야 되오리까”(시편 41: 10)
이 수도자는 복음적 정의의 실천을 위해 죽음을 맞은 혁명군과 곧 죽음을 맞을 혁명군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서 예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혁명군뿐만 아니라 야만적인 프랑스의 살인 부대들도 그의 기도에 포함되고 있다. 이 수도자는 백성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겪은 야훼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바치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이들의 죽음은 결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실패한 죽음이 아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린 인물의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있는데, 이는 벌린 두 팔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그리스도를 연상케 한다. 예수님이 이 상황이라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임을 작가는 확신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아래에 이미 피를 흘리며 엎어진 시신 역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듯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혁명가들의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처절한 죽음이야 말로 작가 당대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재현임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자가 있는 오른쪽과 달리 반대편은 비인격적인 잔인한 폭력앞에 인간이 보이는 약한 모습이다.
뒤편의 사나이 모습엔 공포와 두려움의 흔적이 역력하다. 다른 사나이들도 이제 자기 앞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극도의 절망감의 표현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작가는 이들도 등장시킨 것은 현실감을 더하기 위한 것 뿐 아니라 인간 역사에서 복음의 핵심인 정의와 사랑의 실현은 항상 확신에 찬 용감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아니라 허약한 성정의 두려움 때문에 자기 확신을 당당히 펴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순교자 공경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다 보면 배교자를 그 반대편에 두는 것과 같은 논리와 같다. 순교와 배교는 모든 크리스챤 안에 있는 두 얼굴이며, 하느님의 자비안에서는 결코 제외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등을 돌린 채 서로 얽혀 처형을 감행하는 나폴레옹 군인들은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살인기계들이다. 이들은 긴 칼로 무장하고 가죽 코트에 침낭을 매고 있으며 자신들의 총에 날카로운 단검을 부착해 자신들의 폭력성을 완벽히 과시하고 있다.
이들은 살인을 일종의 유희로 생각하며 자기 능력의 과시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의 무력에 대한 광적인 확신감의 표현은 혁명군을 향하고 있는 총과 옆구리에 차고 있는 긴 칼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폭력은 일시적으로 선을 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지막 승리는 결국 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었음을 이들은 잊고 악행이 주는 광기에 도취되어 있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동원된 정복자 프랑스의 살인기계들 앞에 불 꺼진 교회 건물이 보인다. 스페인이 가톨릭 국가이기에 교회는 억울하게 고통 받는 사람의 친구와 형제가 되어야 하고 이들을 보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할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보다 자기 조직의 강화와 보호에 더 비중을 두는 이상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역시 이런 면에서 많은 실수를 했던 역사가 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리면 조직에 손상을 입을 수 있으니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조직 유지의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불 꺼진 상태에서 숨죽인 상태로 있는 교회의 모습은 복음을 망실한 제도로나 기관으로서의 죽은 모습을 서글프게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교회는 부활한 주님이 계신 생명의 교회가 아닌 죽음의 잡신들의 무덤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스페인 역시 가톨릭 국가이나 여러 독제자의 만행에 침묵하면서 교회는 물리적 손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나, 복음적 생기를 잃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부끄러운 아픔을 체험해야 했다.
이런 시대 예술가들은 신학자들이 표현하지 못한 진리에 대한 대담한 표현을 해왔다. 스페인 역사에서 작가와 파블로 피카소가 대표적인 작가에 속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도그마나 교회법에 묶여 자신의 신앙표현을 주저하거나 회피하는 순간에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너무도 당당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신앙을 삶의 현실의 고발로 표현했다.
작가가 예술 활동을 시작하던 초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예술가의 유일한 목적은 해로운 미신을 떨쳐 버리고, 작품을 통해 진리에 대한 진실한 중언을 불멸케 하는데 있다.”
작가의 후대에 프랑스의 민중시인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
1919- 1982) 은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후 조국이 부활하리라”
작가의 이 작품은 결코 스페인 차원의 애국심 표현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강한 저항과 이 저항 후의 강한 희망을 표현한 점에서 하느님 나라의 승리에 대한 대단한 자극과 격려를 하고 있다.
오늘 이 땅의 교회 일부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강정마을이나 밀양에서 투신하고 있는 외로운 투쟁의 힘을 이 작품은 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