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가대석 (Cantoria)
작 가 : 루카 델라 로비아 ( Luca Della Robbia )
크 기 : 328 * 560 Cm
제작년도 : (1431-1438)
소 재 지 : 이태리 피렌체 교구 박물관
피렌체하면 웬만한 사람은 베네치아와 함께 아직 중세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예술의 도시 정도로는 알고 있다. 대단한 후원자였던 메디치(Medici) 집안 집무실(office)이 오늘날 유명한 우피지 (Uffici)미술관이 될 만큼 피렌체는 예술의 도시로서 대단한 가치와 자부심을 지닌 도시이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운 사랑이 엮어진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 도시는 ,르네상스 문명을 꽃피운 도시로서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있으나 그중의 백미가 바로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의 역사는 르네상스의 정신 즉, “인간성의 재발견“이라는 관점의 신앙적인 의미를 완벽히 표현했다는 면에서 오늘도 그 성당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대성당은 1296년 직물업의 성공으로 대단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던 피렌체 시민들의 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피렌체는 경제성장과 함께 정치적인 안정을 얻으면서 르네상스의 도시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꽃을 따라 벌이 모이듯 여러 예술가 학자들이 모이자, 급속도의 팽창을 이루면서 새로운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자기들의 도시 위상에 어울릴 수 있는 대성당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와중에서 돈벌이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하느님께 대한 것을 소홀히 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구약 하깨서 1장 9절의 말씀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오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 집이 무너져 있는데도, 너희는 저마다 제집 돌보는 데에만 정신을 쓰고 있구나.”
이런 신앙적인 동기 못지않게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바로 자기들보다 훨씬 못한 도시로 여기는 이웃 시에나(Siena), 피사(Pisa), 루카(Luca)에 나름대로 성격에 어울리는 훌륭한 대성당이 건축되었음에도 자기들만 대성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기존의 대성당도 비길 수 없는 아름다운 대성당을 지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는 순수한 열망, 직물 조합원들이 모은 대성당 건축에 넉넉한 자금, 이것을 맡을 수 있는 역량 있는 예술가, 이웃 도시 보다 더 좋은 대성당을 지어보겠다는 선의의 경쟁심은 어느 대성당 건축사에서도 볼 수 없는 튼튼한 기반이 되어 정확한 계획안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대성당 건축에 필요한 인력들은 공개채용에 의해 뽑아 맡겼기에 오늘 까지도 경탄의 대상이 되는 성당을 남길 수 있었다. 세례당(Baptistery)은 기베르티(Gibertti)에게 대성당의 명물인 둥근 지붕 (Cupola) 은 브루넬리에스키(Brunelieschi)에게 유명한 종탑은 프란치스코의 그림으로 유명한 지오토 (Giotto)에게 맡겨 진행했기에 다양성과 일관성에 있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우선 이 대성당의 이름을 “꽃의 성모 성당 : Santa Maria del Fiore"으로 했는데, 여기에서 이 성당 건물이 표현하고 있는 크리스챤 르네상스적인 특징이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여성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해서, 쉽게 성모님을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서 꽃은 구세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라는 토양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 들이고 순종함으로서(루카 1, 26- 38) 이 세상에 구세주라는 생명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막을 제외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꽃이 있게 마련이지만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Toscana) 지방은 특히 3월에서 5월까지 많은 꽃이 피기에 보티첼리도 그 유명한 작품인 “ 봄”(La Primavera)에 190여종의 꽃을 그린 것처럼 꽃은 예로부터 피렌체의 신비스러운 생명의 상징이기에 예수님을 꽃으로 표현했다.
우선 이 성당은 외부부터 특별하다. 백색, 초록색, 흑색의 돌을 조화시킨 본당과, 여기에 이어져 분홍빛 돌까지 약간 가미한 종탑은 그 외양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이것은 단순히 돈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치장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성서에 입각한 정확한 성전 신학에서 기반을 두었는데, 묵시록 (21, 11-12, 15-19)에 나타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 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 두 성문에는 열 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중략)....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었고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성 성벽의 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너무도 화려하고 우아한 외부에 경탄하면서 일단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외부와 전혀 반대로 혹시 아직 미완성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만큼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내부에 다시 놀라게 된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는 왼편 벽에 도시의 상징인 기마상의 부조 하나와 정면의 제단 부분의 십자가, 성당 앞뒤로 있는 시각적으로는 시골집의 조그만 창문 수준의 스테인드 글래스 두 장이 전부일 만큼 내부는 그냥 담백하고 휑한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은 하느님으로 자신을 가득히 채우기 위해 먼저 오욕칠정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강한 상징이며 에페소서3장 18-19절의 다음 말씀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충만하길 바랍니다.”
신학적 의미를 명료히 표현하기 위해 텅빈 성당 내부에 유일하게 빛을 투영시키는 두 개의 창에는 “ 구세주로부터 대관을 받으시는 성모”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내부가 아무런 장식도 없는 공간이기에 이 색유리의 그림이 더 강하게 다가오면서 이 성당의 성격을 극명히 표현하고 있다.
한 인간에 불과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모셔오는 도구로 격상되었으며,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마리아를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자기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후 그에게 더 없는 영광의 관을 씌운다는 것은, 르네상스의 기치인 인간성의 재발견과 함께 인간의 품위를 더 없이 격상시킨 크리스챤 르네상스의 완벽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침 미사가 봉헌될 때 동쪽을 향한 제단 뒤편에 있는 “대관을 받으시는 성모님”의 유리에서 빛이 제단으로 던져지면서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로 결심한 성모님의 믿음이 빵과 포도주와 함께 봉헌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는 것 같은 감동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소개하는 작품은 대성당 앞부분 오른쪽에 놓인 성가대석인데, 이 작품은 성당을 찾는 많은 순례자들에게 복음적인 감동을 주다가 1688년 피렌체의 실세였던 코시모(Cosimo) 3세의 아들 페르디난도가 이 성당에서 혼인을 할 때 혼인 분위기를 더 흥겹게 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개수하는 과정에서 더 큰 성가대석을 준비하면서 이것은 교구 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가는 피렌체 출신으로 이 작품을 의뢰 받으면서 시편 마지막 부분인 150편을 주제로 구상했다.
작가는 이것을 열 부분으로 나누어 하단부에 4개, 상단부에 6개의 조각을 배치함으로서 시편 전체의 요약과 같은, 대 합창 부분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편의 내용을 보자
“주님을 찬미하라 그의 성소 안에서
우람한 그의 하늘에서 주님을 찬미하라
그 하신 일 놀라워라 주님을 찬미하라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주님을 찬미하라
비파와 고를 타며 주님을 찬미하라
손북 치며 춤추며 주님을 찬미하라
현악기에 피리로 주님을 찬미하라
처르렁 바라 치며 주님을 찬미하라
바라 소리 울리며 주님을 찬미하라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이 성서적 내용으로 가득 찬 이 성전에 입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장소의 의미를 확인시키고자 했다. 열 부분으로 나누어진 작품 전체에서 여인네들 , 소년들 어린이들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당시 사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으나 하느님 안에서는 소중한 존재들이기에 이들의 찬송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고 있다.
나팔수 소년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긴 나팔을 부는 아래로 어린 아이들이 그 소리에 맞춰 신명나게 춤을 추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시편에는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춤추고 노래하라는 내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시편 46. 65,80, 95), 현대 전례에서는 이것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근래에 와서 수도 공동체나 어떤 모임에서 조심스럽게 전례 무용이 시도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어린 소년들은 선배 소년들이 부는 나팔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이 춤추는 소년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크리스챤 삶은 이 세상 어떤 부류의 삶과도 비길 수 없이 신명나고 기쁜 것임을 신나는 춤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두 여인이 중세기 현악기인 류트(Lute)를 타면서 노래하는 사이, 친구 같은 다른 4명의 여인들도 어우러져 노래하는데, 악기를 든 오른 편의 여인은 하느님 찬미의 황홀경에 빠진 듯 보이며 그 옆의 여인은 전체와의 화음을 생각하듯 주위를 의식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대로 “성가는 두 번 기도하는 것”이 될만큼 하느님 찬미에 중요한 것이기에 이 여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온갖 정성과 서로간의 화음에 신경을 쓰면서 하느님과 인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찬미를 표현하고 있다.
이 여인들 아래 두 명의 천사인지, 아니면 이 여인들의 아들인지 모를 어린이들이 오른 손으로 어머니를 붙잡으며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 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시는”(시편 8,3)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비록 노래는 부를 수 없어도 몸짓으로 어머니들의 찬송에 동참하고 있다.[
원래 이 성가대석의 아래 부분엔 버팀의 역할을 하기 위해 양쪽에 두 명의 천사들이 있었으나 박물관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두 천사는 분실되었다. 어머니의 치마폭을 잡은 이 어린이는 두 천사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타악기는 악기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악기인데, 이 말은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리듬으로 인간의 감성과 흥을 일깨우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며 우리 악기에서도 북과 장구는 명절 농악대에서 흥을 돋우는데 극적인 역할을 하는 악기이다.
현악기와 관악기로서 시작된 흥이 무르익을 무를 절정체험이 바로 “손북 치며 춤추며 주님을 찬미하라, 바라 소리 울리며 주님을 찬미하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을 향한 찬미라는 것은 조용한 자세로 관조하거나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라 온 몸의 혼을 깨워 흥을 돋우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년전 월드컵 축구 응원에 동원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붉은 악마” 응원단의 응원가처럼 단순한 리듬으로 응원내용을 반복함으로서 심리적, 신체적 일치에 대단한 역할을 한 것처럼 작가는 성가가 주는 천상적, 천사적 음악이라는 비현실적 피안의 차원으로 그치기 쉬운 것을 신나는 축제 체험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차원으로 까지 끌어내려 신앙은 온몸으로도 즐거운 체험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찬미의 절정은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동작으로 흥의 절정에 이른 소년들은 화합의 표시로 손을 잡고 돌면서 노래를 부른다. 하느님을 향한 찬송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격조 높은 일치와 화합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 소년들의 몸놀림이 야외 축제에서 흥의 절정에 달한 순간처럼 유연하고 복장 역시 몸의 동선이 드러나는 그런 것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찬미에 도취된 표정과 이들의 복장이 성당 안에서도 조금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더 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시편 150편은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는 최고의 절정체험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즉 하느님의 향한 상승의 극치, 하강이 없는 절정이 바로 신앙인의 기쁨이며 이 기쁨을 막힘없이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자녀들이 표현해야 할 의무요, 누릴 특권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알렐루야를 전례적으로 부르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뜻의 알렐루야가 실제 삶의 감성적 영역에서 얼마나 체험되고 있는 지는 미지수이다. 신앙이 지켜야 할 법질서의 준수 수준이나, 아니면 해야 할 것을 일깨워 주는 각성제 수준이 될 때, 신앙은 좋다고 여기면서도 신명나는 일이 아니라 삶의 긴장과 피로를 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 교회를 떠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참된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태도를 표현한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현실에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느 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난다. 요한 복음 2장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첫 표징(Sign)으로서 가나 촌 기적의 핵심을 설명하시면서, 그리스도교는 백팔번뇌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중생들의 물처럼 별 맛이 없는 인생살이를 맛갈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하는데, 어떤 때 교회의 가르침이나 사목 방향이나 일선 사목자의 태도가, 포도주처럼 맛갈져야 할 인생을 너무도 재미없고 맛없는 물로 변질 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쉽게 말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 어떤 인간들 보다 더 자유로움속에서 맛갈진 기쁨을 살아가는 삶을 말하며, 교회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것은 크리스챤들은 이 성가대석의 주인공들처럼 하느님 때문에 인생을 멋지게 흥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이것이 교회생활에서 실천될 때 대단한 매력과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작품은 혼돈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과 확신을 줄 수 있다.
신앙이 기쁨이기 이전 자주 무거운 의무로 다가오는 현실, 신앙이 큰 자유이기 이전, 자유로움의 체험을 앗아가는 여러 잡다한 법이나 제도로 묶여진 부자연스러움으로 느껴지기 쉬운 오늘의 신앙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부활 성야 예절에서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라는 감동적인 환호를 하게 되는데 이 환호 후편의 시원하고 정확한 해답을 바로 이 작품이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