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순교자 1.(1921)
작 가 : 에밀 놀데(Emil Nolde 1867- 1956)
규 격 : 121X 106.5cm : 켄버스 유화
소재지 : 독일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인간의 미적 감각은 다양하기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행하던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퇴조하면서 표현주의(Espressionism)가 태어나게 된다.
인상주의 그림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화풍이며, 우리에게도 수련(Nympheas)이나 르왕 대성당 등의 그림으로 눈익은 끌로드 모네(Claude Monet:1840- 1926: )나 목욕하는 여인(Bathers)등으로 우아하고 행복한 여성의 모습을 많이 그린 르느와르 ( Pierre Renoir : 1841- 1919)와 같은 작가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들이다.
이들은 빛과 색채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해 가시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프랑스를 주 무대로 해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의 그림에는 삶의 깊은 의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과 아늑한 환경에서 누리는 행복한 인간의 모습을 , 인생의 고뇌와는 거리가 먼 그런 안락한 삶을 즐기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표현주의란 새로운 화풍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객관적인 사실의 표현보다 인간 사고에 의해 감지되는 주관적인 감정과 반응을 표현하는 사조로서 어떤 의미로 인상주의와 정 반대되는 것이다
작가는 독일 북구 슐레히스비에서 출생해서 독일 스위스를 전전하며 공업 디자인을 공부하다가 1898년 예술의 도시 뮌헨에서 수수 색체와 형태를 탐구하던 아돌프 휄첼과 함께 표현주의 작가로서의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표현주의는 노르웨이나 독일, 덴마크처럼 추운 지방에서 시작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인상주의가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과 대조적이다. 프랑스나 이태리처럼 따뜻한 지방 사람들은 주로 밝고 명랑한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기후가 사람들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 이 작가가 덴마크 국경 근처의 북부 독일 사람이라는 것은 이 작품이 표현주의 작품이라는 것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
작가는 그의 생애에서 종교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의 사상과 예술가적인 신념을 완벽히 재현하고 있으며 . 주제나 형식 모두 종교화이긴 하지만,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과거 종교화의 성스러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 눈에 익숙한 르네상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되고 조화로운 분위기의 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며, 자극적인 색채가 생경스러운 느낌을 훨씬 강화시켜 준다 .
그가 종교화를 즐겨 그렸던 이유는 그의 신앙심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아무런 풍조나 사조에도 걸림이 없는 숭고하고 극단의 정신적 열정이 순교와 같은 성서적 주제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교는 크리스챤 신앙의 절정 체험이며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 이전에 “증거”라는 의미가 있기에 신앙인의 삶은 박해 때에 목숨을 바치던 순교자처럼 혼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어떤 의미의 살아있는 순교자의 모습이어야 하며 가톨릭교회는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다른 교회와 비길 수 없을 만큼 많은 순교자들 모시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초세기 로마 제국의 박해 장면을 전하고 있다.
디오클레시아노 , 네로 황제 시절 많은 크리스챤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를 했는데, 당시 계속되는 풍요 속에서 안일한 삶에 찌들린 그들은 삶의 무위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검투사들의 경기를 만들었고 짐승과 사람이 싸우는 것, 나중에는 짐승이 사람을 죽이는 것 까지 발전하게 되고 크리스챤 순교자들은 이런 비인간적인 로마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군중들의 환호속에 짐승의 밥으로 찢기는 고통을 당했다.
순교를 이야기 할 때 순교의 성스러움과 반대로 무죄하고 순수한 인간을 가장 비참하고 야비한 상태로 몰아가는 인간 군상의 소름이 끼치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모습을 생각할 수 있으며 작가는 이 작품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주면서 삶의 빛과 어둠에 눈뜨게 만든다.
경기장엔 먹이에 굶주린 사자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순교자들의 피를 핥고 있다. 옆구리를 사자에게 물려 이미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혈이 낭자한 사람, 그 뒤로 앞에서 동료가 무참히 찢기는 것을 보면서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지켜 보아야하는 극단적 비극과 공포의 상태를 보여 준다.
삶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두 사람에게 사자가 달려가 먹이로 삼킬 준비를 하는데, 무방비 상태의 여자와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이것을 바라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순교의 장면을 전통적인 순교화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신앙이 있기에 초연히 맞이하는 순교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있으면서 받아들이는 절박한 선택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과거 상상도 못한 파격적인 표현(데포르마시옹 deformation)으로 형태를 왜곡시킨 표현주의 미술은 새로운 관점에서 대상을 보게 만들었으며 현대 추상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매우 거칠고 직설적인 양식의 이 표현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원시적 회화기법의 착상에서 나온 것이며 작가는 자기 작품은 예술에 대해 무지몽매한 농부라도 미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나 독일 르네상스의 시대에 그려진 예쁘고 달콤한 눈요기식의 즐거운 분위기의 그림들과 전혀 다른 격렬한 내적 움직임을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윗부분 붉은 색의 경계는 사자에게 찢긴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상징인데, 그 윗부분에 이 끔직한 상황을 지켜보며 환호하면서 변태적 삶의 쾌락을 즐기고 있는 군상들이 어두운 색깔로 나타나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순교자들의 확고 불변한 신앙인으로서의 성스러움이나 영웅적 삶을 칭송하는 한편 이 비극을 연출하는 인간들의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잔인성을 고발하고 있다.
순교자의 고귀하고 성스러운 면보다 그 저편에 있는 자기와 다르기에 박해하고 죽이고 매장하려는 인간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악마적 잔인성을 고발하는 것인데, 이것은 작가의 체험에서 영글은 것이다.
기존의 전통을 무시하고 표현주의 작가로서 자신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작품 활동을 벌이는 작가가 1941년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작가로 낙인이 찍히면서 작품 활동을 금지 당하게 된다.
생명의 위험이 도사린 이 금지령의 압력하에 연명해야하는 고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작가는 비밀리에 작품 활동을 하면서 크기가 작은 수채화를 그리면서 작가로서의 생명을 키우게 되며 작가에 있어 이 체험은 박해를 피해 까타콤바에서 살아야 했던 초기 크리스챤의 체험과 비길 수 있었기에 이 작품은 크리스챤 신앙 이전 바른 소신을 자유롭게 펼 수 없었던 자기 삶의 압박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크리스챤들이 이 작품 앞에 서면 초세기 순교자이신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의 다음 말씀이 강하게 다가오게 된다.
“ 나의 간청입니다. ....나를 맹수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불도 좋고 십자가도 좋고 맹수의 무리도 좋으며, 사지를 짓이기고 찢어도 좋고, 배를 갈라도 좋으며 팔다리를 자르고 온몸을 난도질해도 좋습니다. 가장 잔인한 형벌이 좋습니다. 다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순교 성인의 바램이 순교 열정의 순수한 표현이라면 작가는 과거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순수한 순교의 의미성을 정확히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작품명: 순교자 3 (1921)
규 격 : 121X 106.5cm :켄버스 유화
소재지 : 독일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그의 예술 활동의 목표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고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종교화를 많이 그리면서도 전통적인 화풍에서 탈피하고 있다. 먼저 그에게 있어 신앙이란 제도적인 교회에서 짜여진 도그마라는 울타리에 갇힌 게 아니라 교회 체계와는 무관한 자유로운 것이었다.
“희랍인 죠르바”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등으로 제도적인 희랍 정교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기성 종교의 가르침과 무관하면서도 신비주의적인 경지에 강한 매력을 느끼면서, 종교의 최고 경지의 표현인 순교 역시 어떤 제도적인 집단의 체제 유지나 옹호를 위해서가 아니면 그 집단 이념에 깊이 빠진 상태가 아니라, 진리와 순수함에의 열망이 너무 크기에 생존보존의 기본 본능을 초월한 상태의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순교는 종교적인 차원 이상이며 모든 선과 신념을 위한 극단의 자기희생과 함께 거짓과 위선에 대한 강렬한 거부하는 숭고한 태도를 말한다.
우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고도의 훈련을 통해 어떤 이념에 세뇌된 그런 틀에 짜여진 성스러움을 보이는 순교자가 아니라 거칠고 자유분방한 원시성을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이는 교회 순교화의 모델 처럼 여겨지고 있는 로마 근위 대장으로 있다가 배교를 거부하고 온몸에 화살을 맞으며 순교한 성 세바스티안의 순교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순교자들이다.
(그림 34번에서 르네상스 화가인 Perugino가 그린 세바스챤의 순교 장면을 이작품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 기둥에 묶인 순교자들은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불세례를 받으며 하느님 외에 아무런 의지할 곳 없는 절망의 모습으로 서 있는데,그들의 발로부터 올라오는 불길은 머지않아 그들의 목숨을 삼키려는 독뱀의 혀처럼 날름거리고 있다.
불 건너 편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로마인들은 그들의 무위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오히려 이런 대단한 구경거리를 연출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도취되어 열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죽어가면서도 그 위에 보이는 밝은 색깔의 상징으로 생명을 보이고 있는 반면 승리에 도취해서 순교자를 죽이고 있는 로마인들은 힘있는 가해자로서 승리자의 모습이 아닌 실패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어두운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둥에 묶여 불타 사라질 순교자들은 나약한 인간들이지만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반면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로마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닌 야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의 승리와 세상 지혜와 폭력의 허구성과 무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신앙이란 최고의 순수한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숭고한 모습보다 자기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을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죽이며 열광하는 군중들의 광기에 더 비중을 두면서 인간 내면 깊숙히 도사리고 있는 악마적 야만성에 대한 고발을 한다.
역사에서 인간은 선행을 한 착한 사람의 생애보다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악행을 저지른 인간들에게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염두에 두고 있다.
과거 르네상스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던 종교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너무 거칠고 원시적인 생경스러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작가는 인간 내면에 축적된 열정과 에너지를 자유롭게 표현해서 과거 조화와 균형을 통해 극도로 절제된 기법으로 표현되던 르네상스 경향에서 과감히 이탈해서 극히 주관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현대 미술의 진로를 개척했다.
모든 기성개념 이나 전통이라는 올가미로부터의 끝없는 해방이 작가의 목표였기에 과거 상상도 못했던 원시적인 방법의 색채 사용도 과감히 할 수 있었다.
기질적으로 조울성이 심했던 작가는 미친 듯 작품 활동에 몰두하다가도 깊은 회의와 자기절망에 빠지기도 하는 등 정신적인 불안정 상태에서 강한 안정감에의 그리움이 있었기에 성서에 대한 주제를 많이 다루게 되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극단의 역설적 삶을 산 예수님 안에서 그가 추구하던 온전한 자유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제도적인 종교의 가르침과 무관한 삶에서도 종교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게 되었으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자기 삶의 그리움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크리스챤들은 이 작품 앞에 서면 성 바울로의 다음 신앙 고백이 마음에 저미도록 다가오면서 어느 전통적인 교회 순교화에서 볼 수 없었던 순교자의 삶을 본받고픈 강한 열정의 감동을 받게 된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혹은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이도,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8; 35. 37-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