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최후만찬(1480)
작 가 : 도미니코 기르란다이오(Dominico Ghilandaio; 1449- 1494)
크 기 : 프레스코 400 * 800cm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최후만찬 사건은 성(聖)미술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이다. 우리의 눈에 익은 것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있으나, 중세기 여러 화가들은 이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작가는 이 주제를 서로 다른 장소에서 3번 그렸을 만큼 대단히 비중을 둔 주제였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에서 예수님이 수난하시기 전날 저녁 자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함께 최후 만찬을 하시는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세운 것이 언급되고 있으며,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끝없이 사랑하신다는 큰 신앙의 표징이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주제에 접근했다.
작가는 당시 대단한 부를 누리고 있던 피렌체에서 여성들의 장신구를 제작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던 은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예술적 자질을 키우기 위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안드레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문하에 들어가 기량을 익힌 후 페루지노(Perugino: 성화해설 34번))의 제자로 공부하면서 스승의 특징인 달콤하다고 여길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법을 익혔으며, 프란치스칸 교황의 요청으로 로마에 가서 시스틴(Sistina) 경당의 프레스코 제작에 참여하면서 기량을 익혔다.
그는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작가로서 복잡한 화면 구성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명료하면서도 경쾌한 기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작업장의 제자였는데, 말년에 그는 스승이 자신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인정했을 만큼 역량 있는 작가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옥니산티(Ogni santi)성당에 이 주제의 작품을 남긴 바 있으나, 이 작품은 당시 피렌체의 성격을 반영하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렸다,
탁발 수도회가 피렌체에 진출하면서 도미니코회원들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여기에 정착하게 된다.
이 수도원에는 화성(畵聖)으로 인정되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1400- 1455)가 원장으로 있으면서, 예술과 신앙의 정수를 표현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피렌체인들에게 신앙과 예술의 조화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
당시 피렌체를 다스리던 코시모 메디치(Cosimo Medici)가 이 수도원 건축 기금을 희사했으며, 그는 이 수도원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방 하나를 받아서 개인적으로 기도나 휴식이 필요할 때 찾음으로 수도자들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며 지냈다.
여기에 원장으로 있던 프라 안젤리코의 경건한 탁발수도자다움이 그의 작품에도 드러나, 그의 작품 전체가 종교화였음은 물론 화려함과 불필요한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면서 사물의 핵심을 추려내어 표현했기에, 그의 작품은 한점 흐트러진 부분이 없이 담백하면서도 완벽해서 오늘도 그의 작품이 그려진 수도자들의 수방(修房)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탁발 수도자들의 단순하면서도 진솔한 면을 읽을 수 있다.
이런 격조 높은 영성생활을 하던 도미니칸 수도자들이 작가에게 이 작품을 의뢰했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수도원 식당에는 “최후의 만찬” 을 그리는 것이 전통으로 정착되었다. 식당은 수도자들이 전체로 만날 수 있는 중요 공간이며, 항상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픈 수도자들에게 식당에서 가질 수 있는 감격적인 그리움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최후 만찬에의 그리움이다.
오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미사 전문 4양식의 성찬 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현양 받으실 때가 되자,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니 저녁을 잡수시면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받아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나의 몸이다.”
수도자들은 미사 때 뿐만 아니라 식사 때에도 이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식당에 “최후 만찬”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수도원의 성격으로 볼 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빈치의 최후만찬과는 달리, 벽면을 장식하는 벽화 형식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제자들이 일직선으로 앉은 식탁과, 새들이 날고 있는 하늘 부분을 구분해서 제작했다.
작가는 식탁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당시 피렌체 사회에서 내노라 알려진 사람들을 모델로 그렸기에 , 경제성장이 가져온 풍요로움 속에 르네상스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던 피렌체 사회를 주름잡던 사교계와 정신세계의 인물들을 이 작품 안에서 한눈에 만날 수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최후의 만찬사건은 그리스도 당시의 사건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삶에서도 재현되어야 할 신앙의 사건임을 상기하게했다.
식탁의 중앙에 앉으신 예수님의 어깨에, 가장 젊은 제자 요한이 스승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요한 복음 13장에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하나가 자기를 팔아 넘길 것이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자, 요한이 너무 놀라고 근심이 되어 그가 누군지를 베드로에게 물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도 요한은 바로 스승의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그분 가슴에 기대어 있다.
주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양편으로 갈라 앉아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 사람이 식탁의 다른 부분에 앉아 있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이다. 그는 주님을 배반했기에 스스로 공동체로부터 이탈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과 다른 쪽에 앉아 있으며 그의 머리에는 성인들의 상징인 후광이 없다.
그는 예수님 맞은편에서 그분을 바라보고 있으나 ,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제자와는 전혀 다른 운명의 인간이다. 그의 뒷켠 바닥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데, 고양이는 배반의 상징이기에 그 앞에 있는 유다의 속셈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만찬 중에 제자들에게“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무척 충격을 받아 서로 누구인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하시며 그 빵을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주셨고, 그가 빵을 받아 먹자 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요한 13, 25- 28)의 내용이 있는데,
주님을 마주 보고 앉은 유다스의 손은 주님이 주시는 빵을 받기 위해 바른 손을 내밀고 있으며, 주님은 바른 손으로 빵을 축복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작가는 주님의 손과 유다의 손을 통해 전혀 다른 운명의 자리를 제시하신다. 주님의 손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매달기 전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빵을 축복해서 나누어주심으로서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선사하는 축복의 손인 반면 , 유다의 손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스승을 팔아넘기는 역할을 맡기 위해 빵에 손을 댐으로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하는 멸망과 저주의 손이다.
아주 고급 식탁보가 깔린 식탁은 급히 준비된 어수선함이나 허술함이 없이 정갈한 모습으로 완벽히 정돈되어 있는데, 이것은 최후 만찬이야 말로 주님이 자신을 주시는 것이기에 더 없이 고귀한 자리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식탁위에 놓인 집기나 포도주 두루미, 잔 어디하나 허술한 것이 없이 잘 놓여 있다. 이런 식탁에 예외적으로 각 제자들 앞에 잘 익은 버찌가 놓여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상반된 상상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하나는 위 부분에 표현되어 있는 천국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음 날 십자가에서 그분이 흘릴 수난의 피를 상징한다.
최후만찬 중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오른쪽의 제자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면서 묻는 표정이다.
왼편의 제자는 자기가 전혀 모르고 있던 유다에 대한 말을 듣고 당황하는 오른쪽의 제자와 달리 유다스의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주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은 듯 슬픈 표정으로 아래를 보며 손을 응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자신의 천재적 자질을 발휘해서 제자의 슬픔을 처리하고 있다. 제자 앞에 두 개의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데, 제자의 포개진 손이 제자 앞 포도주 병에 담겨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피의 제사에 자기도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주님께서 자기를 너무 사랑하셔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제자에게 주셨듯이 자신도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목숨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주님 사랑에 동참하고 보답하겠다는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왼쪽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는 반면, 오른편에는 교회의 으뜸으로 선택된 베드로가 앉아 있다,
자기 공동체에서 스승을 배반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며, 그의 흉계로 스승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믿고 싶지 않은 미래를 스승으로부터 들으면서 그는 오른 손으로 칼을 힘껏 쥐고 있다.
마르코 복음 14장 27- 3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는 구약 즈카리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성미가 급한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 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주님께서는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말을 하면서 스승에 대한 불변의 충실을 서약했다는 내용이 있다.
베드로는 이런 자기의 결심을 대변이나 하듯이 칼을 힘껏 움켜쥐고 있다. 그 옆의 제자는 이미 포도주를 마신 듯 잔이 비어 있다. 그는 주님을 절대 배반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듯 칼을 움켜쥐고 있는 베드로와 달리 주님이 주신 수난의 잔을 받아 마심으로 자기에게 닥칠 미래를 상상하듯 조용히 관조하는 모습이다.
그의 앞에 놓인 빈 잔엔 남은 포도주가 둥그런 붉은 원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솜씨 있는 은세공사로서, 여성들의 장신구, 특히 화관을 만드는데, 특별한 자질이 있었는데, 작가는 둥근 붉은 선이 보이는 빈 잔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로 결심한 제자가 써야 할 순교의 월계관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과거 어느 예술가도 시도한 적이 없는 작가 고유의 시도이다. 과거 이 주제는 성서에 나타나는 대로 최후만찬의 식탁만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어 왔으나 작가는 파격적인 시도로서 새로움을 창출했다.
수도자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식도락에 도취되어 하느님을 잊을까 무척 신경을 썼고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묵으로 식사를 하면서 낭독되는 성서 말씀을 듣기도 했다.
이런 식탁에서 수도자들의 염원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꼭 필요한 현세 식사를 통해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성인들과 뽑힌 이들의 식탁에 초대되는 것을 갈망하고 기다리는 것이었기에 작가는 수도자들의 이런 갈망을 이 부분에서 천국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 물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이 창조하신 것들이 너무 아름답고 대견해서 흐뭇해 하셨다는 내용이 창세기에 계속 언급되고 있다.( 창세기 1, 10. 13, 25 )
작가는 천지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천국에의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수도자의 삶이라 여겼기에 하느님이 만든 세상 중에서 하늘을 그리면서 천국에의 그리움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즉, 지상 식탁에서 육신의 건강만을 돌볼 것이 아니라 천상 식탁의 그리움도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늘 부분을 그리고 있다.
수도자들은 현세 식사를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을 미리 즐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최후 만찬의 식탁위에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열매들이 풍성한 과일 나무 사이를 날고 있는 새들 중에 먼저 공작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창문 아래 세 마리의 조그만 모습의 비둘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상징이다. 항상 인간에게 새로움을 선사하시는 성령의 모습이다.
그 위에 있는 공작새는 불멸의 상징으로 식탁에 앉은 제자들을 응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성체성사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생명의 빵인 당신에 대한 의심을 품는 바리사이들에게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 7: 57-58)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공중을 날고 있는 꿩들은 부활을 상징하고 있으며 ,
매는 그들의 둥지를 밀밭에다 마련하기에 믿음의 상징이다. 검은 방울새는 가시덩굴 속에 둥지를 마련하는 그들 습관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한다.
작가는 당대 피렌체 사람들의 모습으로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면서, 최후의 만찬은 크리스챤 삶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의 반복이 아닌 현세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만드신 하늘 창공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식탁에 함께 할 수 있는 하늘나라에의 그리움으로 관객을 인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