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가족 (1650)
작 가 : 바르톨로메오 에스테판 뮤리요(Murillo) 1617- 1682
크 기 : 144X 111cm 켄버스 유채
소 재 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Prado) 미술관
17세기 스페인은 여러 면에서 대단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종교 재판의 강화로 다른 나라와는 달리 개신교 세력을 원천 봉쇄했고, 교회 자체 정화에도 노력함으로서 사회적 안정과 함께 문화 예술적으로 대단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스페인을 가톨릭 신앙의 바탕위에 절대 왕정을 꿈꾸던 필립 2세 왕이 에스코리알 수도원을 건축함으로서 유럽의 여러 예술가들이 모여 이 수도원에 걸맞는 화풍을 창출할 만큼 스페인은 대단한 문화와 예술의 발전시기가 되었다.
작가는 스페인의 역사 깊은 도시인 세빌리아에서 태어나 생애의 근 절반인 30년을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연관된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히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되었고 우리들에게 가장 눈에 익은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부축하면서 지구의를 밟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그 전까지 화풍과 구별되는 자연주의 기법을 이용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르네상스 예술의 표현인 과도한 화려함과 마네리즘이 표현하는 인위적인 기법에 식상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감동을 창출할 수 있었다.
성가족의 주제는 언제나 가정의 고귀한 가치와 따뜻함을 주기에 많은 작가들이 이 주제에 대한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작가는 자기만의 특성인 자연주의 기법을 사용해서 전통적인 기법에서 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생기를 창출했다.
먼저 전체적인 분위기가 17세기 스페인 가정의 모습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 아기와 함께 지내는 극히 평범한 가정 분위기이다. 여느 성가족 성화에서 볼 수 있는 후광도 없으며 천상적 가정 분위기는 전혀 없고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젊은 부부가 아들의 재롱을 지켜보고 있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이전 인간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계신다. 아기 예수님은 앙증스럽게 오른 손에 새를 쥐고 앞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장난을 치고 계신다. 이것을 아버지 요셉은 여느 아버지처럼 행복스러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계시는데, 작가는 관람자로 하여금 따뜻한 가정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말려 들어가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소박한 분위기가 더 따뜻함을 표시하고 있다.
아기 예수는 어느 성화에서처럼 후광도 없이 보통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계시나 그 손에 쥐고 계시는 새가 바로 그분의 장래 사명을 암시하고 있다. 새는 영혼의 상징임과 동시에 희생의 상징이기에 미래에 그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져야 할 십자가의 희생을 암시하고 있다.
이 따스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안에 이미 주님 수난의 씨앗을 암시하면서 성서의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고자 하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오16, 24)”는 말씀을 다른 성화에서처럼 무겁고 장중함으로서가 아니라 온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통해 전하고 있다.
아기 예수님과 장난치고 있는 개는 충실성의 상징이며, 구약의 토비트의 여정에도 항상 등장하고 있다. 또한 성탄 때 삼왕과 목동들을 따라 주님을 경배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개는 하느님께 충실한 인간의 상징도 된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미래 당신의 공생활 중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의 대상이 될 행복한 시기를 상기시키고 있다. 작가는 여느 아이들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새와 강아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과 사람들 틈에 살아가는 인간 예수의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후광으로서도 과거처럼 동정성의 표현도 아니고 전혀 다른 상징 즉 성모님의 일감을 통해 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가정상에서 성모님은 항상 동정의 모습으로 부각되었다.
주님께서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표시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성모님이 동정녀이시기에, 대부분의 작가들은 처녀처럼 생긴 어머니가 가장 이상적인 성모님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여기에서 전혀 다른 발상을 전개했다. 성모님의 앞에 놓인 바느질 그릇 뒤편에 보이는 길쌈 도구를 통해 성모님은 여느 여인들처럼 주부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대단한 신분이 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삶에 충실하는 것임을, 진리는 비범한 곳에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의 태도에서 증거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지상 삶의 가치 역시 하느님을 따르는 삶에 중요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성모님 주위가 약간 어둠에 싸인 것과 대조적으로 바느질 그릇을 너무 선명히 묘사한 것은 카라바죠의 영향이었다. 십자가나 동정녀와 같은 전통적인 종교의 상징을 사용함이 없이 작가는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모성의 고귀함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항상 작품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을 인물로 하지 않고 어떤 물건을 통해 하는데, 요셉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 요셉의 주위에 놓인 작은 의자와 목공 도구들은 요셉의 직업, 즉 목수직을 상징하고 있다. 과거 성화에서는 마리아의 동정성이나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을 대단히 무력화 시킨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동정 성모의 정배임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은 어쩔 수 없이 무력한 늙은이로 등장시켰으며 어떤 작품에서는 아기 예수님 앞에 경배하고 있는 무력한 노인으로 그리기도 했다.
신앙의 내용을 규범화시키다 보면 본질과 거리가 먼 표현으로 둔갑하는 예가 자주 있는데, 성가정의 내용에서 이런 면이 더 극명히 드러났다.
이것을 너무 안타까워하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요셉 성인이 너무도 멋진 분이심을 자주 강조하셨고 자기 공동체의 주보로 모시기도 했다. 작가는 성 요셉을 예수 나이의 아이를 맏아들을 둔 아버지처럼 젊은 모습으로 그렸다. 열심히 일해서 그리 부유하지는 못해도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서민의 가장이 아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바로 성가정의 모습임을 전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화는 천상의 성가족을 지상에 초대해서 천상적 존재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면, 여기선 지상적 가정의 가치를 천상으로 끌어올리면서 가정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다.
성(聖)과 속(俗)이 이원화되는 것이 아니라 속안에 들어있는 성을 발견하게 만들며 이 세상 가정의 행복속에서 천상에의 그리움을 발견하게 만든다. 성가족의 뒷면 벽을 돋보이게 묘사함으로서 빛을 받고 있는 성가족의 모습을 더 선명히 그리고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과거의 의도성으로 표현되던 성가족의 주제를 자연주의적인 기법으로 처리함으로서 성가정의 의미성을 더 현실적인 감동으로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