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절 규 (Scream:1893)
작 가 : 에드워드 뭉크( Edvard Munch: 1863- 1944)
크 기 : 캠퍼스 유채
소재지 : 노르웨이 오슬로 미술관
9월이 되면 서늘해지는 날씨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여름내 무더위 속에 시달리던 마음도 여름의 더위에 벗어나 맑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4월 세월호의 충격이 안긴 아픔으로 마음의 더위와 답답함이 갈수록 커지는 현실을 살고 있다. 세월호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군대 내 폭행 문제가 터져 많은 부모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거기다 또 멀쩡한 도로 여기저기에서 싱크 홀이 생겨나 붕괴 위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인간다운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충격은 대단했다.
벌써 세월 호 사건이 생긴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대통령의 진의가 의심스러운 눈물에 이어 빈말들의 남발로 한 치의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은 처지에 엉뚱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말로 상처를 주는 무리들의 패륜적인 비참한 작태가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북 유럽에 속한 노르웨이 출신으로 어려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외 작가의 신변에는 여러 이상한 일들이 겹치면서 소심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소년이었던 작가는 일생을 늘 죽음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야 했다.
자신도 어려서부터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을 앓으면서 작가가 느낀 두려움은 그가 남긴 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항상 곁에는 공포와 슬픔, 죽음의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런 성장 배경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이상한 체험을 이 작품에 담게 되었는데, 작가에게 이 작품을 제작토록 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든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 극도의 충격 체험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은 작품 경향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삶의 불안과 공포로 이어지는 절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그려야 한다.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항상 불안에 시달리며 그걸 숨 쉬듯 느끼며,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어야 한다.”
작가가 심취했던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내면적 경험을 최대한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전통의 후기 낭만주의와 깊은 맥락이 있으나, 다만 후기 낭만주의와 다른 점은 표현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부르주아 미학의 반작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불안은 인간 삶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감정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어두움이다.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인간은 여기서 탈출코자 안간힘을 쓰게 되며, 십자가의 주님께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것을 강하게 표현하셨다.
작가는 신앙의 차원 보다 더 깊은 인간적 차원에서 자기에게 닥치는 불안을 절규로 표현했지만, 주님은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절규하심으로서 온 중생들이 겪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공포와 불안에 동참하셨다.
그러기에 작가의 불안은 바로 주님이 겪으셨던 불안과 같은 것이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15: 34)
십자가 위에서 성부를 향해 부르짖는 주님의 이 말씀은 절규보다는 비명이라는 것이 더 어울릴 만큼 인간 심연에 있는 처절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는 것과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가장 깊은 심연에 동참하셨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기쁨이나 성공과 평화를 통한 공감대 보다 삶의 음지에 속하는 슬픔과 실패와 불안을 절규하면서도 인간적인 진실에 더 접근할 수 있는 법이다.
작가의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불안과 슬픔의 개인적 체험이 여과된 이 작품은 제 1차 , 2차 세계 대전이란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역사를 통해 한 개인의 절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절규하는 모습으로 부상하면서 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 주제의 작품을 4번이나 남길 만큼 진지한 인생체험의 표현이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인들에게 이 작품은 자기들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큰 자극제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성서에 나타난 인간들의 드라마 역시 이 작품과 너무나도 닮은 절규와 비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서의 인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절규한 것처럼 하느님을 향한 절규와 탄식을 계속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된 삶의 터전인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복지의 꿈에 부풀어 떠나던 이스라엘 인들은 예기치 못한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서 야훼께 부르짖으면 도움을 청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어보니 이집트인들이 그들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 주님께 부르짖었다.”(출애굽 14: 10)
지상 삶을 사셨던 예수님 역시 파리사이들의 반대 못지않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것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히브 5:7)
교회가 가르치는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작가의 처지에서 탈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십자가에서 주님이 외치신 절규는 부활이라는 죽음이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 것처럼 크리스챤 신앙의 중요한 선포로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하신 분이시며, 죽음의 권세를 꺾기 위해 세상에 오셨지만, 어떤 고통도 제거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여느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에 동참하셔서 이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처럼 하느님을 향해 절규하셨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선량한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겪는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시고 당신이 그 고통에 동참하시면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격려하신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마태 5: 4) 고 하시며 절규하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루카 7: 13)
절규를 통해 드러나는 현세의 고통과 슬픔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이 걸어야 할 여정과 같다.
절규하면서 살아야 하는 크리스챤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의 말씀으로 자신을 추스르며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절규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위로의 손길이 뻗칠 날이 있음을 성서는 확실히 알리고 있다.
“어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하느님의 선물인 사랑과 평화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이런 단계에서 하느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서는 알리고 있다.
즉 절규는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건너야 할 강, 통과해야 할 여정의 필수적인 코스로도 볼 수 있다.
미국 시사잡지 뉴스 위크(News Week)의 편집장으로 일했던 유명한 언론인 아더 르브(Arthur Lubow)는 이 작품을 일컬어 현대 예술의 모나리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름다움의 표현을 예술의 지상 목표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이 작품은 좀 편치 않는 심정을 일으키나 예술이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이 작품은 인생의 심원한 면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좋은 작품이다.
더욱이 세월 호 사건의 시작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총체적인 부실한 우리의 현주소를 확인하면서 이 사건이 주는 의미의 이해 확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수도자의 기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는 소리 당신을 향해 외치나이다.”
이 작품의 남자와 너무도 어울리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