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교회 안에 계신 성모 (The Madonna in the church)
작 가 : 쟌 반 아이크 (Jan van Eyck )
크 기 : 목판 유채 31 × 14cm
소재지 : 독일 베를린 국립 미술관
모성애의 그리움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의 표현이며,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본성인 자비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모 공경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신심 행위로 볼 수 있다.
교회 역사에서 과장된 성모 신심의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간학적인 관점과 성서에 바탕을 둔 성모님의 모습은 어느 교리서 못지않게 교회의 본질 설명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작가는 15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로마에서까지 그 명성을 인정받던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유럽의 여러 궁정에서 주요 수집 품목이 되었다.
오늘 날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에서 발달해 유럽 문화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던 프랑드르(Flemish art)의 대표적 작가로서, 이 작품을 통해 중세 예술의 특징인 고도의 상징성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묘사함으로서 성당이라는 지상 공간 안에서 인간 모자의 관계성이라는 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표상을 통해 크리스챤이 믿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완벽히 표현했다.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성당 안에 서 계신다. 어머니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은 사랑하는 아들을 안고 있을 때라고 한다면 이 순간의 성모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며, 이것은 또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의 상징이다.
성모님의 얼굴은 더 없이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인데, 이것은 비잔틴 전통에서 형성된 성모님의 모습을 희랍어로 Eleusa 라고 불리는 처녀의 부드러움을 표현함으로서 모성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서 계신 성모님의 모습은 교회가 가르치는 어떤 이론적 표현보다 더 자연스러운 크리스챤적인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임과 동시에 새로 시작되는 교회의 어머니임을 드러내고 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예수님은 그 뒤편에 보이는 벽감 속에 있는 성모자상과 같은 모습으로 서 계시는데, 이것은 성당 안에 서 계시는 성모님이야 말로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있은 후,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도에 전념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사도행전 1:12 - 2:3)
작가는 성령강림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를 지킨 제자단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순절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가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2: 1- 3)
이런 성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왼쪽의 벽감에 있는 두 천사가 찬미가를 부르면서 더 없이 정감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성모님은 이스라엘의 조그만 마을인 나자렛 출신의 동정녀이시나, 작가는 이런 성모님이 하느님의 영광을 입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서 그분이 받게 되는 영광을 드러내고자 성모님에게 화려한 왕관을 봉헌하고 있다.
보석 박힌 왕관을 쓰신 성모님은 여왕처럼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계시는데, 이것은 "승리한 교회"(Ecclesia Triumphans) 안에서 성모님의 위상이 천국의 여왕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시편의 다음 구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아들네 보다 짝 없이 아름다우신 그 용모 당신 입술에는 은총이 넘쳐흐르기에, 주께서 당신을 영원히 축복하셨나이다. 제왕의 따님들이 당신께 마중 나오며 오필의 금으로 단장한 왕후는 당신 오른편에 서 있나이다. 듣거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이라, 네 겨레와 아비 집을 잊어 버려라.” (시편 44:3, 10-11)
작가는 작은 화폭에 사진처럼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서 천상에의 그리움을 한껏 표현하는 고딕 대성당의 웅장하고 우아한 모습에 어울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모님의 모습을 일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성모송에서 드러나고 있는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여인” 으로서 너무도 하느님을 닮은 성모님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다. 어떤 어둠도 없이 오직 빛 자체이신 하느님을 반영하고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또한 스테인 글라스를 통해 쏟아지고 있는 이 빛은 성모님 동정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모님은 여느 여인들처럼 아들 예수를 낳으셨으나, 성모님의 출산은 성령의 작용이었기에 동정의 영광을 간직하고 계신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중세 신학자들은 바로 이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성모님의 동정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즉 유리를 통해 들어온 빛이 유리 자체를 조금도 손상치 않는 것처럼 성모님의 동정성 역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출산으로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온전한 동정녀이심을 이 빛이 상징하고 있다.
바로 이 작품에서 성당은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성모님에 비해 성당이 예외적으로 작게 그려진 것은 성모님 자신이 바로 교회의 상징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었다.
아기 예수를 안으신 성모님은 성당 중앙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계시나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심과 동시에 하느님의 딸이시다. 그러나 그의 처지는 하느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 불과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여인으로서의 성모님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 역사에서 성모 신심을 어떤 때 과장되어 성모님의 위상이 여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된 적이 있었으나, 작가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딸과 함께 십자가 아래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성모님을 부각시킴으로서 성서적 바탕에 근거한 성모 신심의 바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왕관을 쓰신 성모님의 옷자락은 지혜서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배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지혜 7: 29)
성모님의 붉은 옷 색깔은 그분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안에는 중세 신학과 민간 신앙에서 영근 격조 높은 상징주의와 있는 그대로를 보이고픈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뒷면에 나무에 새겨진 조각들은 성모님 생애의 일화들을 보여줌으로서 작가는 성모님의 크게 부각된 모습을 통해 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어머니로서의 성모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천사들의 합창이 들리는 가운데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성모님의 모습이야말로 가톨릭교회가 구현하고 있는 최고의 인생이며, 멋진 현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 전까지의 교회의 가르침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원죄론에 의해 타락한 죄인으로서의 인간이었다면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교회가 억압했던 인간 육체성의 재발견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서 멋지고 아름답다는 것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성모님이야 말로 하느님이 만드신 인간의 품위를 최고로 드러내는 걸작임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성의 재발견과 인간 삶에 대한 긍정성을 강조하던 르네상스의 태동을 알리는 작품이다.
근년에 메튜폭스(Mathew Fox) 라는 신학자가 원복(Original Blessing) 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이것은 교회 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충격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교회 신학은 인간을 원죄(Original Sin)로 타락한 존재로서의 부정적 관점에서 접근했으나, 작가는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긍정적인 차원의 인간을 제시했다.
이 작은 작품 안에 담겨 있는 많은 상징들에 쌓여 있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모습은 현대 신학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충만하신 전능자 하느님이 만드신 걸작이며, 인간의 모든 긍정적인 차원을 표현했다는 면에서 대단히 과감하고 예언적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중세 작가의 작품이나 하느님 안에서 표현되는 아름다움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