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젠하임 제단화 :부활부분 (1515)
작가: 마티아스 그뤼네발드 (1470-1528)
크기 판화 유채 269X 141Cm
소재지 :프랑스 콜마르 운테린덴(Unterlinden) 미술관
이 부분은 지난번 소개한 작품의 또 다른 한 부분이며 작가의 신앙이 여과된 완성 부분이다.
작가는 당대에 가장 두려워 하는 병에 걸린 환자들의 순례지를 찾는 이들에게 신앙안에서 희망을 선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 한점이나 되는 작품을 세 부분으로 구분해서 제단화로 만들었다.
중앙 부분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양쪽 부분에 "예수 성탄과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 다른 한쪽에 "예수 탄생 예고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작했다.
평소에는 중앙 부분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 현시하다가 주일이나 다른 축일이 되면 양쪽을 다 열어 예수 성탄으로부터 부활에 까지 이르는 신앙의 내용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전혀 상반되는 주제를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던 스웨덴의 성녀 비리짓다의 신비체험 기록인 묵시록(1350년경)의 흐름에 따라 작품을 제작해서 신앙의 내용을 더 심화시켰다.
작가는 마태오 부활 사화에 나오는 천사를 옆 작품인 "예수 탄생 예고" 에 나타나는 부분에 등장시키면서 빛과 어둠, 죽음과 생명이라는 부활 신앙의 주제를 한 점의 군덕지 없이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주제를 마태오 복음의 부활사화를 중심으로 접근했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 쳤다."( 마태오 28: 1-2: 4)
작가는 이 내용을 과거 어떤 화가에게도 발견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시도했다.
부활은 오른쪽 , 예수 탄생 예고는 왼쪽에 두면서 루까복음 1: 26- 38에 나타나고 있는 천사가 예수 탄생예고와 부활사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어느 작품에서도 보기 힘든 휘황 찬란한 색채로 강렬히 표현했다 .
여기서 작가는 부활한 생명의 실상을 너무도 설득력있게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강렬한 빛 속에 싸여 계시는데, 이 빛은 태초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 순수한 광채의 빛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참으로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창세기 1: 3- 5)
죽음의 상징이었던 수의를 벗어던지고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은 모든 제약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모습으로 계신다.
죽음과 악의 힘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는 천상 생명의 승리의 상징이며 모든 크리스챤들의 희원인 완성된 모습의 모델이다.
작가는 강렬한 색체와 격정적인 선의 처리를 통해 어느 다른 작가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환상적인 분위기를 창출했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다시 부활한 소우주의 개념을 도입해서 양팔을 벌리고 사각형 안에 서 계시는 모습으로 부각시켰다.
성서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 27)고 하셨기에 인간은 창조의 척도이자 결정이 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기에 창조의 척도이자 결정이 된다."
작가가 도입한 소우주의 이미지는 인체의 각 부분들이 우주와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신비주의 학설에서 시작되었는데, 중세기에 와서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는 생각에 도입되었으며 작가는 이런 이론의 바탕에서 구도를 설정했다.
어둠과 죽음 단절의 상징이었던 무덤을 막았던 돌이 부활하신 주님 앞에 자기의 기능을 상실한 무능한 모습으로 있다.
작가는 빛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래 , 어둠의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통쾌히 그리고 있다.
윗부분의 바위처럼 주님이 입고 계시던 수의 역시 죽음의 상징이었는데, 강렬한 빛에 쌓여 계신 주님 아래 널부러진 수의는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는 이것 역시 부활한 생명의 실상을 일깨우는 반전 표현이 되고 있다.
정신없이 쓰러져 있는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은 어둠 세력의 상징이다.
이들은 무죄한 구세주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만큼 이 세상을 지배하던 세력들이었는데 ,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세력은 햇빛 앞에 죽어가는 병균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다.
이들은 부활의 강렬한 에너지 앞에 눈이 먼 채 바닥에 쓰러지고 있다.
윗부분에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이 선의 승리의 상징이라면 경비병들은 악의 종말의 상징이 된다.
빛과 어둠의 구도를 분명히 하면서 죽음과 생명, 빛과 어둠이라는 크리스챤 부활 신앙의 핵심을 너무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가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죽음은 더 이상 군림하지 못합니다"(로마서 6: 5- 9)
이 작품 앞에 선 관람자들은 중앙에서 만난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 투성이의 몸을 보면서 느꼈던 인간적인 비애와 공포를 벗어나 부활한 주님안에 드러나는 크리스챤 생명의 실상을 발견하면서 마치 천국에 입성한 순례자처럼 더 없는 생명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독일 르네상스 대표 화가로 자리매김 했으며 20세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표현주의(Expressionism) 예술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가는 당시 독일의 실세였던 마인즈(Mainz) 대주교에게 발탁되어 궁정작가로서 활동하면서 어느 화가가 누리지 못했던 세속적이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나 그의 생애는 많은 부분이 신비의 그늘에 가려져 있으며 외적인 화려함과 달리 실재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 제자도 없이 혼자 작품 활동을 하면서 좌절과 혼란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고통의 절망에 빠진 환자들에게 복음적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서 뿐만이 아니라 혼란스럽기만 한 자기 삶에 복음적 해답을 찾기 위해 이 작품에 매달렸다고도 볼 수 있다.
부활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음악 중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프레드릭 헨델의 (Fredrich Handel:1685- 1759)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인데 이 마지막 부분인 "알렐루야 합창곡 "은 주님 부활의 생명과 영광을 찬양한 극적인 것이며 , 이 작품과 너무도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 앞에서 헨델의 합창곡을 들으면 주님 부활의 감동을 시청각 적인 차원에서 즐길 수 있다.
좋은 질문입니다.
성화를 그린 작가들은 많은 경우 어떤 교호 단체나 은인들의 요청으로 작품을 제작하게되는데,작가가 그린 작품에 감동받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주문하면 다시 제작하게 되었기에 같은 주제의 여러 작품이 있을 수 있고 특히 자매님이 문의하신 엘 그레꼬는 거의 작품 전체가 성서에 나타난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런 경향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주제는 동일합니다만 표현은 그때의 신앙체험을 담았기에 조금씩 차이도 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사나 모조품이 아니고 작가의 다양한 신앙의 표현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은혜로운 부활절 맞으시길 바라며
기쁜 부활 맞이하세요.^^ 잘 읽고 옮겨가요.
참...어제 TV보다가 콥트기독교라는게 있다는걸 처음 알았어요.
그런 기독교도 있었구나...싶은데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