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 토마의 불신(1505)
작가: 치마 다 꼬레니아노 (Cima da Cogliano: 1459- 1517)
크기 : 템페라 유채 : 215X 151cm.
소재지 : 이태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주님 부활 사건을 한 주간 내내 경축한 교회 전례는 부활 제 2주일에 주님의 부활 사건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제자 한 사람 앞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심으로 그의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어준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 불신의 사도 토마가 주님의 주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본 후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 20: 28)하고 고백한 것은 교회의 첫 신앙고백이 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에 주님 부활에 이어지는 성화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작가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르네상스 예술의 초기를 시작하던 시대에 활동하면서 산 사무엘레(San Samuele) 석공(石工) 조합의 성당 장식을 위촉 받아 제작했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스쿠올라(Sculoa)라는 명칭의 평신도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보통 동업자들의 모임으로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복음을 실천하던 단체였으며 , 이들은 자기들의 처지에 맞는 애덕 실천을 통해 복음적 증거를 했으며, 예술에 대한 관심도 표현 해서 이들 형제단의 본부 중 산 로코( San Rocco)와 산 마르코 (San Marco)스쿠올라는 오늘까지도 찬란한 베네치아 예술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명소로 남아 있다.
갯펄위에 세워진 도시국가라는 천성적 어려움의 극복을 위해 베네치아 인들은 신앙의 가치를 어느 것 보다 강조하는 습관이 형성되었으며, 그중에도 부활신앙은 천혜의 악조건에서 세상 어느 국가 보다 더 이상적이고 풍요로운 환경을 만드는데 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에 정확하고 도전적이며 진취적이었던 베네치아의 기질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신앙의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인들의 기질 형성에 부활신앙은 대단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 베네치아에는 예수 부활 성당이나 부활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 특징이 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인들이 중요시 했던 부활 신앙의 중요 부분을 제시했다는 면에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스승을 만났단 다른 동료의 말을 듣고도 직접 확인치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토마에게 나타나시어 그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도록 토마에게 가슴을 열어보이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의 벗은 상체와 몸을 덮은 흰 수건은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상징한다.
생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 ( 요한 8: 12)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 부활하셨기에 그분 안에는 어떤 어두움도 없음을 보이고 있다.
그분의 부활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결실이기에 죽음이 없는 생명이며 , 빛 자체이심을 드러내고 있는데 다음 성경 구절을 연상시킨다.
" 하느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록 22: 4- 5)
예수님의 뒤편엔 백발이 성성한 주교가 정장을 하고 서 있는데, 이분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다.
사도 토마, 예수님에 이어지는 인물은 막뇨( Magno) 주교로 당시 베네치아 석공 조합의 수호성인이다.
사도 전승과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리자의 역할로 부각시키고 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주님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데, 오늘도 교회는 도마처럼 신앙에 회의를 품고 있는 신자들에게 의심없이 믿을 것을 가르치고 있기에 주님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이 전달되듯,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뜻이 오늘도 교회 안에 면면이 흐르고 있음을 막뇨 주교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ㅣ
세 인물의 배경으로 드러나는 경치에서 성곽이 있고 , 그 앞을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것이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거룩함에 대한 폭 넓은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거룩함이란 교회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게 아니라 세상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곳은 바로 주님 부활이 증거되는 장소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세례를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 모시는 모든 이들은 다 주님 부활의 증인이며 ,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 1: 9)
작가는 도마의 불신은 성서에만 나타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있을 수 있기에 오늘 나의 문제로 여기며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 인물중에 사도 토마는 어둠속에 싸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어떤 이유로던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두지 못한 상태는 어둠의 상태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이다.
작가는 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르네상스 기법의 우아한 아취와 상쾌한 베네치아의 경치를 불신과 믿음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부활신앙의 체험은 성서적 배경으로서의 회귀만으로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도 된다.
밝은 모습의 주님과 어두운 얼굴의 토마를 대비시키면서 믿음과 불신의 상받된 모습을 제시하듯 윗부분 역시 상징적인 빛과 어두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마음의 모든 불안과 어둠이 사라지면서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 부활을 전할 수 있었던 제자들의 밝은 마음과 손가락으로 못구멍을 확인하기 까지 믿지 못했던 토마의 어두운 마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아취 위 부분을 덥고 있는 어둠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의 어둔 마음이다.
의혹 속에 불신의 태도를 지녀야 했던 토마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해야 했고
그러기에 토마의 마음은 구도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의혹과 다른 의미의 자기중심적인 독단에 갖힌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는 어두움이 있었다.
믿음이 생명이라면 불신은 죽음과 같기에 불신은 어두움이라는 구름이 깔려 있는 상태이며 이것이 바로 토마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 어두움의 아래는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희망과 기쁨의 상징인 밝음과 청아함이 우아한 르네상스 건물의 아취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세상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이 공존하기에 교회에 대한 실망스러운 소식들은 우리들을 불안과 실망에 빠트릴 수도 있으나 부활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항상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작가는 좀 생경스러운 어두움과 청아한 풍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역시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태동하던 시대였기에 신앙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의 어두움이 드리운 현실에 대해 실망하고 불안해 했던 시기였다.
교회안에 하느님이 계시는가?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인가 ? 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던 때였고, 동업자로서의 신앙 결속을 모인 이 형제단원들 역시 뜻있는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증가하던 시기였기에, 회원들의 신앙의 정화와 결속을 위한 어떤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인 생명과 빛을 보지 못하고 자기 폐쇄의 벽에 갖혀 어두움속에 있다가 주님의 도움으로 못자국을 확신한 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신앙 고백과 함께 어둠과 죽음의 상태에서 빛과 생명에로 탈출한 사도 토마처럼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사도 토마의 의심과 불신앙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유혹이며 도전이 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도 토마의 의혹과 불신의 분신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 메스콤을 통해 들리는 일부 교회 소식의 어둠에 마음 아파하며 작품속에 들어가다 보니 다음 성경구절이 생각난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 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량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고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대어 내신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 12: 2-3)
나는 그렇게 빈말만 늘어놓으니 내 의지를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곁에 머물 수 있겠는데 도와주세요...라고
어제 저녁 미사 때 말씀 드렸지요.
고맙게 읽고 옮겨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