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976년 시카고에 입성하신 예수님 (1976)
작가: 로져 브라운 (Roger Brown: 1941- 1995)
크기 : 켄버스 유채: 182 X 308cm)
주님이 수난을 준비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교회는 성주간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 지상 사명의 시작이기에 많은 작가들이 이 장면을 그렸다
성서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 앉으시자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어 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꺽어다가 길에 깔아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앞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시민이 들떠서 “이분이 누구냐?”하고 물었다.
사람들은 “이분이 갈릴래아 나자렡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하고 대답하였다“( 마태오 21: 7- 11)
작가는 경건한 신자 가정에 태어나 장차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삶을 목표로 삼아 성서 공부를 할 만큼 탄탄한 신앙의 기반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미술을 공부하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는 미술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신앙을 표현하기로 결심하고 이 작품을 효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전통적인 형태에서 파격적으로 탈피해서 현대인들이 대단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만화 형식으로 희극적인 표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게 특징이다.
오른쪽에 예수님께서 트럭에 붙은 화물을 싣기 위해 마련된 트레일러를 탄 채 입성하신다.
비록 현대 교통 수단인 트럭을 타고 오시지만 그분은 현대 복장이 아닌 성서에서 예수님이 입었다고 믿어지는 그런 옷을 입으시고 거리의 행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신다.
예수님의 복장은 그분이 빌라도 앞에서 하신 말씀 “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 36)를 상기시킨다.
트럭 운전수 역시 주님과 똑 같은 동작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현대에도 소수이나마 여러 방법으로 세상에 복음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크리스챤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세속화에 물결에 휩쓸려 신앙을 잃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살아가는 현대 교회안에도 굿굿히 자기 신념에 충실한 신앙인이 있는데 이 운전사야 말로 이런 크리스챤의 모델이다.
이 운전사는 성서의 다음 말씀을 상기시킨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면 너희는 힘을 받아 ,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사도행전 1: 8)
이것은 또한 극도로 세속화된 사회에서 새로운 예술적 표현으로 복음을 전하고픈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트럭 주위의 군중은 앞의 복음에서 나타나는 열렬한 환영과는 대조적이다
오직 한 명의 여인만이 자기 코트를 벗어 트럭 앞에서 환영을 하고 있다.
길거리의 행인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무슨 구경꺼리를 보듯 쳐다보고 있다.
한마디로 호기심 이상의 아무것도 없는 무관심의 표정들이다
이 무관심하게 서 있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 손을 흔들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현대인들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과거 처럼 종교에 대한 반대나 관심도 없는 무관심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느님이 계시던 계시지 않던 그게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종교에 대한 무관심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된 환영대에는 시카고시의 대표격인 공적 인물들이 도열해 있다.
붉은 복장의 대주교는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공식 책임자로서 환영 분위기를 키우기 위한 두 명의 악사를 동행하고 있다.
그 옆의 뚱뚱한 푸른 복장의 신사는 이 도시의 시장이며, 그 옆의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은 남녀는 이 도시를 대표한 사람들이다.
환영대에 도열한 사람들 중 대주교와 시장 두 사람이 유난히 뚱뚱한 모습인데 , 이것은 그들이 지닌 권력을 상징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화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붉은 색으로 신성을 푸른색으로 표현하곤했다.
시장과 대주교의 복장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존재임을 복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정교(政敎)의 상징적 대표로서 손색이 없는 세상적 의미의 구색을 다 갖춘 사람들이다.
작가는 여기에 현대에서 종교가 보이고 있는 허상의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종교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 나면서 이제 종교의 영향력이 더없이 약해지고 종교가 세상에 보이는 태도 역시 진정성이 없는 형식으로 변질했다.
시카코의 대표격인 이들은 도로변에 서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는 몇 명의 군중과는 대조적으로 그냥 자리를 지키는 자세로 서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 방문 자체 보다 메스콤의 보도 경향일수도 있다.
작가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입성에 보이는 실망스러운 모습과 대조적으로 앞에 나타난 운전수와 길거리에서 주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몇 명의 군중으로 우리 시선을 초대하고 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거창한 조직이나 힘있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환호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두어야 할 보물들임을 알리고 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들어내 보이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오 11: 25)
시카고의 상징과 같은 번영의 상징인 마천루에는 층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모두 자기들의 업무에 몰두하고 있기에 이들에게 예수님의 방문은 거의 무관심의 상태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주가의 변동이나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들에 대해선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열광하나 종교적인 사건에 대해선 별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요행이 각 빌딩 마다 몇 곳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빈방이 있는데, 그들은 아마 예수님을 알고 방문을 영접하기 위해 떠난 사람들의 방인듯 하다.
맞은 편 연립 주택에 있는 주민들 역시 예수님의 방문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들의 가정사에 몰두하고 있다.
작가는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좀 생소한 만화적 기법으로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미국 사회 종교현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이 작품을 제작한 1976년은 미국이 크리스챤 가치 실현을 국시로 하여 독립한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0년 전 미국인들의 조상들은 크리스챤적인 가치의 기반으로 살 수있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미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결심을 까마득히 잊고 오직 물질의 축적만이 성공의 표시로 여기며, 영토를 확장하고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학살하면서 까지 노력해서 대단한 번영을 이루었다.
한마디로 이런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다.
성서에 나타난 예루살렘과 또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루살렘은 입성하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한 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도시라면 현대 도시의 상징인 시카고는 조상들이 예수님과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자본주의적 체제의 이익 창출에 몰두하면서 큰 번영을 창출한 또 다른 의미로 예수님을 배반한 도시이다.
작가의 견해에 의하면 미국은 이제 여느 다른 나라를 처럼 더 이상 복음적 이상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가 아닌 하느님께 무관심한 현대 국가 하나로 전락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이 도시에도 서서히 복음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다.
성서에서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던 몇 명의 여인들에 의해 부활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처럼 신앙에 대한 극단의 무관심을 보이는 시카고 도 주님이 타신 트럭 운전사나 주위에서 손을 흔드는 몇 사람에 의해 복음화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얼굴이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는 환영대를 차지하는 인물들과 달리 그림자 처럼 검은 색갈로 얼굴도 드러나지 않으면서 주님을 환호하고 있는 민초들이야 말로 교회의 보배요 희망의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름대로 성서를 공부했던 작가는 성서의 다음 구절을 상기시키며 하느님 없이도 살수 었는 것 처럼 극단의 세속화를 향해 달리는 현대인에게 정직한 각성과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내가 기를 못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리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야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하리라 "( 스바니아 3: 12)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징후는 하나 같이 신앙과는 등을 돌린 서글픈 현실들이지만 성서에서 대단한 환호 속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어이없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에서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서글픔 속에서도 시카고의 하늘에 보이는 여명처럼 신앙은 새로운 꿈틀거림을 시작하고 있다.
마치 가장 처절한 실패로 끝난 것 같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벅찬 생명의 부활이 시작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주님을 잊고 이윤 창출에 골몰하고 있는 마천루 저편에서 부터 서서히 새벽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성서적 신앙을 생소한 만화의 기법으로 표현하면서도 어떤 기성 작가와 또 다른 매력적이며 신선한 방법으로 신앙이 주는 희망과 낙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신천지로 온 미국인다운 도전으로 현대인들의 정서에 부합할 수 있는 대단한 풍자와 재치를 작품 안에서 드러내면서 신앙의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