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식스도의 마돈나(Madonna Sistina :1512)
작 가 : 라파엘로 산치오 (1483- 1520)크기 : 265X 196cm ,켄버스화
소재지 : 독일 Dresden, 고전 회화 전시관
지난 3월 바티칸과 독일 정부가 이 작품이 제작된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동으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한 작가의 작품 발행 년도를 기념하기 위해 두 나라가 합작으로 우표를 발행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는 일이나 라파엘로의 작품 중 유독 이 작품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면에서 우표 발행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미 성화 해설 14번에서 다루고 있으나 500주년이라는 의미있는 계기를 맞으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교황 율리오 2세가 라파엘로에게 주문한 것이다
당시 라파엘로는 29세의 젊은이였으나 이미 바티칸에 작품을 남길 만큼 진가를 인정받는 작가 였다.
작가가 이 작품을 의뢰받을 당시 유럽은 참으로 어수선했다
평화의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이 많은 전쟁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의 야망이 전쟁을 부채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유럽 전체의 통일을 위해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 실현을 자기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것을 위해 모든 이태리 군주들을 자기 세력하에 굴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작전상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 있던 피아첸자(Piacenza) 시가 자발적으로 교황의 수중에 들어오는 쾌거를 만나게 되었다.
교황은 이 갸륵한 양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피에첸자 시에 있는 베네딕또 수도원에 이 작품을 하사했다.
중세 미술 평론가인 바사리(Vasari)는 이 작품을 “ 드물게 볼 수 있는 탁월한 작품”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상하게도 다른 작가의 작품과 달리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약 250년이나 수도원 수사들의 관심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아기 예수와 성모님의 모습 때문이며 이것이 이 작품의 특성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성모님의 얼굴은 더 없이 아름답고 청순하게 그리는 것이 그전 까지 작품 경향이었으며 작가 역시 너무도 아름다운 성모상을 많이 그려서 오늘까지도 그의 위상은 성모님을 통해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것은 성모님에게 가장 먼저 강조되는 동정성 , 겸손 , 순종이라는 덕행 표현과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복음에 나타나고 있으면서도 겸손과 순종이라는 미덕에 포장되어 간과되었던 성모님의 중요한 면모를 과감히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성모자의 중요한 특성은 바로 눈빛과 자세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당당함이다.
순종이라는 미덕에 밀려 진면모를 숨기고 있었던 성모자의 당당한 모습이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며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유순함이나 종속성과는 거리가 먼 당당한 도전적인 눈빛이다.
다른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을 조건없이 받아들인다는 유순한 눈빛이 아닌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응시하는 눈빛이다.
아기 예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의 사랑에 만족하며 젖가슴을 더듬고 있는 행복한 어린이가 아니라 미래의 자기 사명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이 눈빛에 드러난다
아기 예수의 눈빛은 날카로운데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애에 중요한 면을 담고 있다.
그분은 어린 시절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을 하는 처지였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끊임없이 반대자들에게 시달리는 삶을 사셨다
아기 예수님의 어린이 답지 않는 눈빛은 그분의 이런 미래 사명을 미리 예시하고 있다.
그분은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정화에서 나타나는 것 처럼 하느님의 뜻이 아닌것에 어떤 타헙이나 자기를 굽힘이 없는 도전적인 삶을 사셨다.
"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칙을 만들어 양과 소를 무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한복음 2:14)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잘 손질된 머리의 곱상스런 서양 미남자가 아니라 온갖 반대와 분노를 감내하면서 굳굳히 저항한 혁명가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그동안 너무도 여성 취향의 감상에 묻혀있던 성모자의 복음적인 모습을 발굴해서 당당한 자세와 눈빛을 통해 표현했다.
성모님 역시 공생활을 시작하신 아들 예수를 뒷바라지 하지 위해선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어머니 처럼 능동적이며 도전적인 자세로 사셨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하인들에게 명령한 “ 무었이던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
( 요한 2: 5)는 표현과 골고타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친 삭막하고 비참한 현실을 당당히 수용하신 성모님의 강인한 모습을 작가는 여기서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 25 )
베틀레헴 말구유라는 비참한 환경에서 아들을 낳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성모자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성모님과 아기 예수의 이런 당당함이 생경스러움으로 닥아와 별로 과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예술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있던 쟉센 주의 제후였던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의 끈질긴 집념과 결단으로 드레스덴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대가의 작품이 흔하지 않았던 독일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철학적인 기질이 있는 독일의 예술가 중에 이 작품에 매료되어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와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여성주의(페미니즘)의 예언적 표현 , 즉 성서적 관점에서 여성의 위치를 숙고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또한 페미니즘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페미니즘은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평등과 인간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로 보게 만드는 관점이며 남성주의(마초이즘)의 강한 영향권에 있는 우리 교회에 필요한 변화와 쇄신에 대단히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
·하느님 백성의 평등을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는 교회안에 중세기 사고방식을 닮은 남성위주의 사고방식과 여성에 대한 종속적 견해가 생기게 된 이면에 성모님의 겸손과 순종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간과되었던 성모님의 당당한 모습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미리 표현했고
이것은 남성위주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당시에는 생경스러움으로 닥아와 홀대되다가 현대에 와서 각광을 받으면서 복음적인 모습의 여성주의의 긍정성을 예언적으로 표현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성모님을 너무도 정확히 파악하고 표현했다
그는 단테의 영향을 받아 성모님을 단테의 신곡의 경지처럼 중생들을 지옥에서 연옥 천국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생각했다
정화가 윤리적인 회개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정화를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여정의 모델과 인도자로 성모님을 설정했다.
이런 정화의 과정을 작가는 작품 제작을 통해서 거치면서 성모님의 모습 역시 더 복음적인 모습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하게 되었다.
성모자의 좌우에 당시 유럽의 실력자인 교황 율리오 2세가 자기 가문을 과시하기 위해 가문의 문장인 도토리가 새겨진 교황관을 옆에 두고 있고, 한쪽엔 당시 피에첸사 시의 수호성인인 성녀 발바라가 자신의 순교를 상기시키는 탑을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더 없이 장엄하면서 긴장감을 풍기게 된다 .
한마디로 천상과 지상의 실력자들이 동시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긴장과 위압감을 주고 있다
여기에 겹쳐 성모자는 이제 관객들과의 거리가 한 두 발자국 정도처럼 가까운 거리에 서게 됨으로 관객들은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두 천사를 등장시킴으로 관객들에게 당황함의 긴장을 덜어주는데 , 여기에서 작가의 천재성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무료한 표정으로 성모자와 관객들을 응시하는 두 천사를 등장시킴으로 작품이 풍기는 경직성과 당황함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다.
천사가 삼각 구도를 이루면서 안정감을 더함과 동시 관객들에게 당황하지 말고 성모자를 바라보라는 초대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사는 하느님의 아들을 안은 천상의 여왕과 지상의 실력자인 교황과 그 도시 수호 성녀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장난기 풍기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기에 작품 앞에 서면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이 아닌 모챨트나 하이든의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상쾌한 감흥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거룩함과 해학이라는 전혀 다른 정서를 융합시킴으로 경직되기 쉬운 관객들을 여유있는 푸근함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화에 등장하는 천사들이 많지만 이 천사들은 천사의 대표처럼 자리매김을 하면서 많은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다
“웃음을 포함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라는 프레드릭 니체의 말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셈이다
오늘도 드레스덴 미술관에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빠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모나리자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드레스덴에서는 이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250년이나 잊고 있었던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하고 즐겼던 독일 시인이나 철학자들 처럼 나름대로의 멧세이지를 전달받고 있다.
그것은 여성 취향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갈망하면서도 간과되기 쉬웠던 중요 부분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갈수록 교회는 텅텅비고 있다.
복음을 전달하는 기본인 설교나 강론이라는 단어는 “지루하고 따분함”이라는 달갑지 않는 정서로 변질되는 것이 현대인들의 정서이다.
그래서 강론 중 명강론은 짧은 것이란 자학적( ?)표현도 생기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현대인의 정서에 맞는 한편의 멋진 강론으로 볼 수 있다
오늘 교회는 성미술을 교회 장식용이 아닌 복음전파의 새로운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할 실재적 필요성앞에 직면해 있는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도 현대인에게 대단한 감동과 생기를 선사할 수 있는 한편의 멋진 시각적 강론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구입하던 와중에 생긴 일화도 예사스럽지 않다
당시 유럽 미술 시장에서 라파엘로나 티치아노 같은 대가의 작품 시세는 대강 1.000스쿠도였는데, 작품의 소유자였던 수도자들은 성모님께 대한 애정 때문인지 이 작품 시세를 엄청나게 불렀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쟉센 제후의 통큰 결단으로 작품은 26,000 스쿠토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세로 낙찰되어 독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월이 흐르면서 제 값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은 갈수록 더 힘있고 설득력있는 강론으로 교회 생활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복음적인 생기과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생기와 감동을 줄 수 있는 복음 선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