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율법과 은총(1530)
작가 : 루카 크라나흐 (Lucas Cranach elder :1472-1553)
크기 :목판 템페라 32.4 cm X 46.5cm
소재지: 독일 고타(Gotha)미술관
10월 31일은 개신교에서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내고 있으며, 오는 2017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여러 개신교에 뜻있는 지도자들은 자성과 통찰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 있는 시기를 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신부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를 순례하면서 철석같이 성도(聖都)로 여겼던 로마 교황청의 악취 나는 모습에 실망을 금하지 못하던 차, 드디어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모습을 위해 소위 우리 교회에서는 대사(Indulgence)라고 하지만 개신교를 위시해서 사회적인 통념어가 된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1517년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부패를 반대하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루터의 견해에 대해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넌덜머리를 느끼고 있던, 유럽의 뜻있는 신자들과 지성은 불같은 호응을 한 반면, 기득 세력인 로마 가톨릭과 관계되는 사람들은 엄청난 반대라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작가는 16세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작센의 선제후 프레드릭의 휘하에서 궁정화가로 활약을 하면서, 프레드릭 제후가 있는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에 횃불을 밝히던 마르틴 루터를 알게 되고 그와 각별한 우정을 유지하면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했던지 마르틴 루터는 작가의 딸 안나의 대부가 되었고, 작가는 마르틴 루터가 결혼할 때 증인이 되어주었으며, 루터의 딸의 대부가 될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작가는 루터의 가르침 중 주요 테마였던 “율법과 은총” 이라는 주제에 대해 여러 작품을 남김으로서 루터의 견해 전파에 일조를 했던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제후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제후 편에 서서 농민전쟁을 반대하면서 폭동에 참가하는 10만명의 농민이 학살당하는 참사를 방관한 마르틴 루터처럼, 재력과 권력이 있던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도 부담 없이 친교를 지니는 양다리를 걸친 삶으로, 당시 그 도시에서 납세 면에서 가장 부유했던 두 명의 부자에 속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전적으로 마르틴 루터의 견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라는 루터의 견해를 우의적인 표현으로 옹호한 교훈적 내용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아래 열린 돌무덤이 있다. 그 돌무덤 주위엔 인간의 삶을 압박하던 죽음과 악의 세력들이 뒹굴고 있다.
고개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죽어 있는 뱀이 악의 세력의 상징이라면, 그 옆에 있는 두 개의 괴물은 죽음의 상징들이다.
중세기는 많은 상징을 사용하던 시대였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 곁에 뱀이 등장할 때, 뱀은 단연코 원수이고 악의 세력을 상징한다.
염소 역시 최후 심판 때에 영원한 벌로 심판 받을 악인을 상징함으로서(마태25,32- 33)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만든 온갖 인간의 간계와 악함의 결집으로 당한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생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셨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악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가 완연히 드러나는 빈 무덤 앞에 세례자 요한이 어떤 벌거벗은 사내를 안내하면서 손가락으로 무덤 쪽을 보라고 안내하고 있다.
작가는 이 벌거벗은 사내를 구원받은 인간의 상징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성서에서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감옥에 갇히고 살로메의 유혹을 거부하다 목이 잘려 순교한 초대교회에서부터 대단한 공경을 받던 성인인데, 작가는 여기에 새로 일어난 마르틴 루터를 세례자 요한에 비기고 있다.
제도적 교회는 언제나 관료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에게 빌붙어 권세를 부리는 인간 집단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이들은 그럴듯한 논리와 뭣보다 폭력에 가까운 힘으로 자기 반대세력들을 꺾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루터가 넌덜머리나는 로마 교회가 강요하던 복음과는 거리가 먼 법적인 규범을 강요하던 것을 거부하고 은총으로 구원된다는 진리를 이 사내에게 가르치고 있다.
벌거벗은 사내는 소위 당시 로마 교회가 면죄부, 대사라는 교리로 가르치던 공로사상과는 거리가 먼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인간의 상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종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선 인간적 선행을 통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지나치다 보면 마치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로패로 둔갑하게 되고, 이런 종교 풍토에서 생긴 것이 바로 루터가 분개했던 우리 교회가 저지른 면죄부 사건이었다.
루터가 여기에 반발해서 죄인인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가능하다는 루터의 가르침을 벌거벗은 사내를 통해 표현하고 외롭게 투쟁하는 루터야 말로 이 사내를 하느님께 안내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화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런 방어기제도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서있는 사내 앞에 밝은 광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구원한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이 벌거벗은 사내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마르틴 루터가 제시하는 이상적 크리스천 인간상의 상징이다.
위와 달리 이쪽에서 예수님은 천상계에 계시는데, 지상계는 교회가 지배하는 데, 유목 민족들의 천막 같은 여러 천막이 즐비하나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모세와 당시 교회 지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계명판을 들고 십계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세의 지시를 받고 있다.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율법뿐이고 율법이 지배하는 것은 하느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마르틴 루터의 견해를 부정적인 차원에서 보이고 있다.
어느 종교도 다 그렇듯 종교가 대형화되면서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고 여기에 율법적인 차원은 도입되게 마련이다.
복음이 로마에 전파되면서, 로마의 법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성장과정에서 도움이 된 면도 없지 않았으나, 교회가 자기 방어적인 처신을 위해 만든 많은 법들은 복음을 질식시키는 비닐 포장지의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이며, 이것이 마르틴 루터 당시는 극도에 달해 있었다.
법적인 차원이 복음 보다 더 강조되다 보면, 복음을 질식시키는 악법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모세를 중심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들고 있는 계명판이야 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복음과는 거리가 먼 교회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많은 악법들을 상징하며, 이런 데서 나온 것들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악마의 결단이기에 이 사내는 악마에 끌려 어둠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작가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를 단순히 개혁자들의 견해와 다른 것이라는 표현이 아닌 악마의 소행이라고 단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율법에 메인 로마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묵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짐승의 교회라는 것을 전하고 있다.
앞에 그림에서 벌거벗은 사내는 부활하신 주님의 앞에 있는 것과 달리, 여기선 하느님이 공중에 천사들과 함께 머물러 계시고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모세로 상징되는 교회 지도자들이 율법판을 들고 서 있다. 작가의 판단에 당시 로마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교회가 아닌 예수를 등에 업은 사악한 인간들이 지배하는 교회로 이해되었다.
그 위 에덴동산으로 보이는 곳에 아담과 이브가 서 있으며, 그들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구원에서 제외된 것처럼, 당시의 로마 교회 역시 율법의 강조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악마의 집단이 되었으니, 빨리 떠나 은총의 교회인 마르틴 루터에게로 합류하라는 강한 초대의 뜻을 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율법주의의 비성서적인 허구성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서와 은총으로(Sola scriptura, sola gratia)를 강조하는 개신교로 와야 한다는 견해가 종교개혁 주일이면 개신교 설교의 필수 메뉴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변하고 있다. 뜻있는 개신교도들은 이제 중세기 로마 교회의 부패가 바로 자기 안에 들어와 있음을 인정하고 이제 로마 가톨릭을 비방할 것이 아니라, 자기 개혁에 몰두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개신교 어떤 예술 잡지는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21세기 개신교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의 시기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떠나 기복주의, 팽창주의로 교세확장에만 급급한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타락한 중세 교회의 현실을 봅니다.”
세계 대형 교회 50개 가운데, 24개가 한국에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이 땅에 있는 현실에서 그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고 있는 차마 종교인으로서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 널부러진 현실에서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 한다는 자조적 해학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외치던 “오직 믿음과 은총으로서 구원의 길은” 너무도 엉뚱한 물질적 성공 강조나 교회의 대형화 같은 복음과 거리가 먼 방향의 부패로 치닫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다만 혁명이 아닌 통찰의 바탕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견해가 퍼지고 있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 작품을 이제 가톨릭 신자들이 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봐야 할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종교 집단 보다 더 제도화되고 이 제도를 지키기 위한 많은 법들이 널부러진 현실에서 교회가 복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아직도 우리에게 이 작품을 통한 복음적 사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