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기 예수의 경배 (Adorazione di Gesu bambino)
작 가 : 지롤라모 지오봐노네 (Girolamo Giovanone: 1490- 1555)
크 기 : 목판 유채
소 재지 : 이태리 베르첼리 보르고냐(Vercelli Borgogna) 미술관
이태리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태어난 작가는 당시 예술을 이해하던 군주와 왕성한 경제력의 뒷받침으로 대단한 수준에 있던 밀라노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초기 르네상스 작가로서 특색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교회 안에서도 서서이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과거 제왕적 성격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리스도 생애에 사건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를 시작하면서 지오또(Giotto)에 의해 그리스도의 표현에서 인간적인 차원이 많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표현에 자주 등장하는 당시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성탄의 평범한 주제이면서 작가의 개성이 돋보이는 것이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밀라노 공국의 군주 스포르자가 문화와 예술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대단한 투자를 보이던 시기였기에 오늘 세계적 패션 도시로 자기 매김된 밀라노의 아름다움이 한껏 자리매림을 하던 시기였다. 작가 역시 이런 시대적 관심에 심취해서 르네상스의 성격이 다분한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특히 성탄 사건을 르네상스의 인본사상과 접목시킨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는 탄생하신 아기 예수와 요셉 마리아 그리고 천사들이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며 마구간의 모습이 아닌 괜찮게 지어진 도시 공간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심으로 성탄의 사건을 성서적 배경이 아닌 작가가 생존하던 시대로 가져옴으로 관람자들에게 성탄이 바로 자기 시대의 사건임을 강조시키고 있다.
먼저 단아한 표정의 마리아와 항상 그렇듯 아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그리스도의 양부라고 불리는 요셉이 갓 탄생한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다.
그런데 성모님의 단아한 모습과 성 요셉의 팔을 벌리고 있는 즉흥적인 모습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부모이면서도 그 역할이 전혀 다름을 상기시키고 있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미사 전문에 “천주의 모친이며 복되신 마리아에 이어 그 배필이신 성 요셉을” 삽입시킴으로 성 요셉 신심의 위치를 격상시켰는데, 당시 요셉 신심의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모셔올 도구로 선택된 성령의 도구이시며 탄생한 아기 예수는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아셨기에 더 없이 경건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런 성모님의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성 요셉은 아들을 낳고 기뻐하는 평범한 어버이의 모습으로 그렸다.
성모님은 붉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색 외투를 두르고 계신다. 이것은 성모님이 아들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기 위해 갔을 때 성전에서 만난 예언자 시몬의 말을 상기 시킨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트리기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사람의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뚫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 34 – 35)
성모님이 아들을 낳은 이 기쁨의 순간에 구세주로서 인류를 구원하는 큰 역할을 위해 아들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구름, 어머니로서의 받아야 할 마음의 아픔을 암시하는 검은 옷을 입고 계신다.
요셉은 검은 색깔은 그냥 스치는 수준이고 붉은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모님은 당신 아들에게 닥칠 미래의 수난을 예견하시며 이 기쁨의 순간에도 수난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고 계신다. 작가는 색깔이 주는 상징을 적절히 활용하여 성탄의 기쁜 순간에 어떤 십자가의 흔적도 없이 그리스도의 수난신비로 관객을 초재하고 있다.
예수님의 주위에 일군의 아기 천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내려와 있는데 이들의 복장 역시 벌거벗은 아기 예수와 거의 비슷한 모습들이다. 다만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 날개를 달고 있는데, 이 날개의 색깔은 인간 요셉이 입은 옷과 같은 색들이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너무 대견스러워서 자기들도 아기 예수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흥겨워하고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인간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시작되었다. 유한하고 부족한 육신의 조건을 놓인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께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린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이들은 구세주를 경배하는 이들의 기쁨을 더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하면서 하나는 성모님의 등 뒤에서 재롱을 떨면서 성탄의 자연스러운 기쁨을 전하고 있다.
아기 예수는 성모님의 검은 옷자락에 누워 여느, 어린이처럼 팔을 벌리고 계신다. 아기 예수님은 여느 어린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냥 어린이의 모습이다. 그 전 시대 성탄에선 아기 예수는 비록 아기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연상시키는 아기로 부각시켰으나 여기에는 더 없이 평범한 어린이의 모습이다. 고추까지 다 내놓고 있는 자연스러운 어린이 모습의 구세주이시다.
여기에서 르네상스의 인간관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적인 가치를 상대적으로 강조하던 르네상스 인들을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모습이나 아니면 성 세바스챤의 순교를 통해서도 육체의 표현에 과감해서 희랍 조각을 통해 드러나던 육체와 큰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부각시켰다.
이것은 희랍 예술에서 인간의 육체는 가장 하느님을 닮은 것으로 여긴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야 말로 가장 신적인 것이란 표현의 또 다른 면으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는 신성에 대한 것의 극단의 강조로 신이 되기 위해선 인간적인 모든 것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팽배했는데,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인간성에 대한 긍정적인 차원, 즉 인성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으로서 우리 인간의 처지는 하느님을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처지로 극상되었다.
그러기에 예수 성탄의 주제야 말로 르네상스 정신에 동감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주제가 되었다.
아기 예수의 곁에는 성경이 놓인 조그만 탁자가 있다. 일군의 천사들의 재롱과 성모님의 경건한 모습에 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것이다.
탁자위에 놓인 성경은 단순히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떠나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선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작가가 관람객을 위해 교육적 차원의 배려를 한 것이다.
작가의 당시는 종교개혁의 여파에 성서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폐쇄적이고 위축된 처지였다. 말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평신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하자, 상대적으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분열의 중요 원인이 평신도들의 손에 성서를 쥐어 줌으로 생긴 것으로 생각해서, 성서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에 빠져 있었다.
인문주의 정신에 성숙한 의식이 있었던 작가에게 당시의 교회 태도는 더 없이 옹졸하게 보였기에 작가는 예수 성탄의 마구간에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성서를 읽으라는 강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점에서 작가는 신앙의 내용을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시대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복음적 교훈을 선사한 혁명적 복음 선포자라 볼 수 있다.